한국 IT산업의 개발자 쥐어짜기는 유전병?

[심층해부] 산업 태생기부터 시작된 IT업계의 ‘고질적’ 불공정하도급의 굴레

2010-03-05     윤희은 기자

[매일일보=윤희은 기자] IT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대기업의 프로젝트 아웃소싱 비율은 약 50% 이상이다. 절반 이상의 프로젝트가 하청업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하도급 대금을 제대로 주지 않거나 계약도 하기 전에 일부터 시키는 경우가 부기지수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삼성SDS, LGCNS, SKC&C 외 국내 유명 IT업체들은 2005년부터 끊임없이 공정거래위원회의 경고를 받아왔다.

그러나 지난해 5월까지도 한국IBM이 ‘동부생명 차세대시스템’ 프로젝트와 관련, 시스템 구축에 차질이 빚어지자 하도급업체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대금 지급까지 미루는 행태를 보이는 등 불공정하도급과 관련한 고질적인 문제점은 쉽게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신성장 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IT업계의 이러한 하도급문제는 산업태동기인 93년부터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온 부분이다. 그 원인은 무엇이며, 해결책은 어디에 있을까. <매일일보>이 짚어봤다.

중대형 IT업체들, 비용부담 회피하면서 수익만 노린다?

일부 심한 업체는 ‘게이트’역할만…죽음의 다단계 심화


국내의 한 소형IT업체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는 A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퇴사를 고민한다. 쉴 틈 없는 빡빡한 업무일정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임금조차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출근한 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프로그램 개발업무를 소화한다. 이 프로젝트는 본래 국내의 대형 IT업체가 낙찰 받은 것이나, 해당 대형 IT업체는 바로 중형 IT업체에 하청을 주었고, 이 중형 IT업체는 또 다시 소형 IT업체에 프로젝트를 맡겼다.

이 과정에서 대형 IT업체와 중형 IT업체가 공제한 비용을 제외하고 나면 A씨가 근무하는 소형IT업체 근무자들에게 남는 돈은 턱없이 적다. 실제로 A씨는 A씨보다도 근무시간이 훨씬 적은 대형 IT업체 개발자들의 63% 수준에 해당하는 연봉을 받고 있다.

다단계하도급에 우는 소형IT업체들

국내 중대형 IT업체들로 이루어진 IT산업협회의 최효근 실장과 모 대형IT업체 관계자는 “IT업계는 특성상 하도급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전문인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이를 충원하기 위해 하청을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IT노동조합의 나경훈 사무국장은 IT업계의 하도급문제에 대해 “인력을 운용하는 것은 부담되고, 그 와중에 이익은 남기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하며 “국내의 유명 IT업체들은 자사의 네임밸류를 무기로 프로젝트를 수주한 뒤, 정작 그 프로젝트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으려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나경훈 사무국장에 따르면 이러한 유명 IT업체들의 횡포는 컨설턴트 명목 하의 ‘게이트’역할로서 드러나기도 한다. 프로젝트 발주자인 ‘갑’으로부터 프로젝트를 수주해 모든 프로젝트를 전두지휘해야 할 ‘을’ 기업들이 하청업체인 ‘병’에게 일방적으로 프로젝트를 떠넘기기만 한다는 것.

이러한 대형업체들의 외면 속에서 프로젝트는 ‘병’에서 ‘정’으로, ‘정’에서 ‘무’로 점점 더 내려가며 하청을 반복하게 되고, 그만큼 단가도 낮아진다. 단가가 낮으니 최소의 인원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해야하고, 결과적으로 혹사당하는 것은 소형IT업체의 개발자들이다.

게다가 하도급이 반복되다보니 프로젝트에 대한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않다. ‘갑’에서 ‘을’, ‘을’에서 ‘병’, ‘병’에서 ‘정’으로 이어지는 다단계식 하도급구조에서 ‘갑’이 원하는 부분을 ‘정’이 신속하게 수행하기에 무리가 따르는 것. 한 영세IT업체 실무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좋은 결과물이 나오겠느냐”고 호소했다.

의사소통이 아예 되지 않아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기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책임도 가장 하위단계에 있는 ‘정’의 몫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IT업계에는 “하청을 준 업체 개발자들과는 친분을 쌓지 마라”는 불문율까지 존재한다. 하청업체 개발자들에게 정을 들이면 마음대로 부릴 수 없기 때문이다.


‘범인’은 누구일까

이러한 고질적인 병폐의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근본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한 법. 그렇다면 이와 같은 IT업계의 불공정하도급 사태를 불거지게 하는 ‘범인’은 누구일까. 대답은 각자 입장에 따라 제각각이다.

재벌그룹계열의 대형 IT업체인 B사 관계자는 “IT업계의 고질적인 불공정하도급 문제의 핵심은 재하도급”이라며 “그것에 대해 우리 업체가 책임을 져야할 의무는 없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반면 IT노조의 나경훈 사무국장은 “맨 처음 수주를 받은 중대형 IT업체가 소형 IT업체나 영세 IT업체에 프로젝트의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관행이 없어져야 할 것”이라며 “일부 업체들은 무리한 프로젝트를 제시해서 일부러 다 완수하지 못하게 만든 다음, 그것을 핑계로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경우도 빈번하다”고 꼬집었다.

이와 같은 IT업계의 하도급 거래는 공정거래위원회에서도 매년 제기되어오는 문제점이나, 최근까지도 개선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 대변인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IT업계 불공정하도급과 관련, 영세IT업체들을 대상으로 서면 조사까지 했으나 하청을 준 대형IT업체의 보복이 두려웠던 탓인지 영세IT업체들 측에서 협조를 해주지 않았다”며 “사실 하도급문제는 IT업계에서만 발생하는 문제가 아닌 만큼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IT업계의 한 관계자는 IT업계의 불공정하도급을 두고 “일명 ‘폭탄 떠넘기기’라고 할 수 있는 이기적인 행태”를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기반이 탄탄한 대형 IT업체가 보다 작은 규모의 IT업체에 하청을 맡기는 것이 반복되면서 대형 IT업체는 ‘원가절감’ 및 ‘책임전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반면, 작은 규모의 IT업체는 ‘적은 임금’에 ‘막중한 책임감’까지 떠안게 되는 비극적인 결과가 도출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