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 손병희 선생, 횡보 염상섭 선생이 흰 모자를 쓰고 있는 까닭은?

2007-02-08     매일일보

눈이 내렸습니다. 간만입니다. 서울에 이렇듯 하얀 눈이 내린 건, 서울에 이렇듯 많은 눈이 내린 건…. 광화문에 나가 보았습니다. 교보생명 빌딩 옆 소나무들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갑자기 내린 눈이 부담스러운가 봅니다.

광화문 네거리 이순신 장군이 머리에 흰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두꺼운 갑옷 위에도 흰 옷이 한꺼풀 더 얹혀져 있습니다. 광화문 우체국 정문 바로 앞 인도변엔 눈사람이 세워져 있습니다. 눈도 있고 코도 입도 있습니다. 손에는 아랫면이 빨간 면장갑을 끼었습니다. 점심 시간을 맞아 떼지어 음식점을 향하는 직장인들이 죄다 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춥니다. "야…쟤 디게 귀엽다." 종각역 쪽으로 걸음을 옮겨봅니다. 흰 나무들에 둘러싸인 보신각이 시야를 가득 메웁니다. 한폭의 풍경화 같습니다. 평소엔 빌딩 숲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그 모습이 오늘은 유난히 불거져 들어옵니다. 할아버지들이 많이 찾는 종로 2-3가 경계에 위치한 파고다 공원은 왠일인지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눈싸움을 하기도 하고, 눈사람을 만들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서울 도심 속에서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보는 이들의 기분이 좋아집니다.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도 머리에 흰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옛날 성현들이 약속이라도 한 모양입니다.

종로 4가 종묘공원에도 들러보았습니다. 이곳의 주인이신 할아버지들은 모두 팔각정 아래 모여서 담배를 피우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습니다. 공원은 흰눈 천지입니다. 소설가 횡보 염상섭 선생이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따뜻한 날, 염 선생 의자 옆자리는 할아버지들의 잠자리입니다. 할아버지들은 염 선생의 다리에 머리를 누이고 눈을 감은 채 나른한 오후를 즐기십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닙니다. 그 자리를 흰눈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바로 옆 의자엔 그 눈에 자리를 내준 듯 할아버지 한 분이 의자에 신문을 깔고 앉아 상념에 빠져 계십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종로 5가 6가를 거쳐 동대문에 이르는 길. 저마다 가게 앞 길에 쌓인 눈을 치우느라 분주합니다. 이렇게 봄은 오는가 봅니다. 이번 눈이 올 한 해를 환히 밝혀주는 서설(瑞雪)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서룡 위클리서울 기자 sljung99@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