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자본에 흔들리는 한국 기업

엘리엇 사태 계기 ‘투기자본 공격에 무방비’ 병폐 드러나
ISD로 번지지 않을까 우려도…‘취약한 지배구조’가 원인

2016-06-15     이한듬 기자
[매일일보 이한듬 기자]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반대하고 나선 것을 계기로 외국계 투기자본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된 한국기업들의 병폐가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이 같은 문제는 단순히 기업과 주주의 경영권 분쟁을 넘어 투자자와 국가간소송(ISD)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는 점에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삼성물산 지분 7.19%를 보유한 엘리엇은 최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반대 입장을 공식화했다. 삼성그룹의 삼성물산 지분율이 13.8%에 불과하다는 구조적인 취약점을 파고들어 경영권 개입을 시도하는 셈이다.이에 삼성물산은 KCC에 자사주 899만557주, 지분 5.79%를 처분하며 추가 의결권 확보에 나섰지만, 엘리엇은 곧바로 삼성물산과 이사진, KCC를 상대로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는 등 치열한 신경전이 이어지고 있다.외국계 투기자본이 국내 기업을 상대로 공격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삼성물산은 엘리엇 사태 이전에도 지난 2004년 영국계 펀드인 헤르메스가 지분 5%를 사들여 우선주 소각을 요구하면서 경영 분쟁을 겪었다.여기에 다른 외국계 기관투자자들까지 가세하면서 삼성물산의 외국인 보유 지분율은 46%까지 확대됐고, 이에 맞서 삼성그룹도 지분을 확충하는 등 방어에 나선 바 있다.SK그룹도 지난 2003년 외국계 운용사인 소버린이 최대주주로 올라서며 최태원 회장의 퇴진을 비롯한 경영권 개입을 시도해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이 외에 이밖에 KT&G는 영국계 펀드인 TCI와 미국의 큰 손인 칼 아이칸 등 외국계 주주와 법정공방 등 경영권 분쟁을 겪었다. 현대그룹 역시 쉰들러로부터 유상증자 방해를 비롯한 경영권에 대한 공격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아직 분쟁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외국인 지분 보유 비중이 높은 기업들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례로 현대차그룹의 경우 현대모비스의 외국인 지분율이 50.16%에 달한다. SK그룹도 핵심 계열사인 SK텔레콤의 외국인 지분률이 44.45%라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더 큰 문제는 최근 우리나라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가 늘어나면서 투기자본들이 국내 법원에 제출한 가처분 신청 등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투자자와 국가간소송(ISD)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ISD는 투자자가 특정국가의 법령이나 정부의 정책 때문에 피해를 봤을 때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에 제소해 손해배상을 받도록 하는 제도로, 현재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상대로 진행하고 있는 소송 역시 ISD조항이 있어 가능했다는 평가다.투기자본들의 경영권 개입은 정당한 주주의 권리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지금까지의 사례를 보면 분쟁 과정에서 급등한 주가로 차익을 챙긴뒤 내빼는 ‘먹튀’의 패턴을 보여왔기 때문.일례로 소버린은 SK와의 경영권 분쟁 당시 8000억원이 넘는 차익을 챙겼고, 헤르메스도 2004년 삼성물산과의 분쟁을 통해 300억원의 차익을 거뒀다. KT&G를 공격한 칼 아이칸 역시 1500억원의 차익을 얻고 한국을 떴다.이 같은 문제의 근본원인으로는 취약한 지배구조가 꼽힌다. 삼성물산의 경우 최대주주인 삼성SDI의 지분율이 7.18%이며, 이건희 회장과 특수관계인을 더해도 13.65%에 불과하다. SK나 KT&G역시 대주주의 지배력이 약한 상황에서 경영권에 대한 공격을 받았다.재계에서는 투기자본의 적대적 M&A에 대해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포이즌 필이나 차등의결권주식 발행 등의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포이즌필은 경영권침해시도가 발생하는 경우 기존 주주들에게 회사 신주를 시가보다 싸게 매입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다.차등의결권주식은 주식에 따라 의결권에 차등을 두는 것으로 복수의결권주식, 부분의결권주식, 무의결권주식 등이 있다.경영권 방어수단 도입에 대해 지난 2010년 한 차례 도입이 검토됐으나, 국회 논의과정에서 무산됐다가 올해 들어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기획재정부에 규제 완화 과제로 법제화해 줄 것을 제안한 상태다.전경련 관계자는 “일부 외국자본은 고액배당과 유상감자 등으로 단기간에 과도한 이익을 실현 후 국내시장에서 철수하거나 투자약속은 지키지 않고 유망기술을 유출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며 “부작용을 예방하려면 미국, 일본, 프랑스 등이 경영권방어수단으로 허용하고 있는 포이즌필, 차등의결권 주식발행 등을 도입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