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빅3', 스크린쿼터보다 무섭다?
CJ, 롯데, 오리온 ‘투자-배급-극장체인 수직계열화'
2006-02-17 권민경 기자
<일각 “한국 영화 양적 성장 불구, 양극화 현상 심화">
스크린쿼터 축소를 둘러싸고 영화계, 재계, 일반 시민 너나 할 것 없이 축소 반대론, 혹은 옹호론을 펼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여기에 문화관광부가 후속 대책이라고 내놓은 방안은 오히려 ‘현실성 없다’는 영화계 비난만 사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가운데 영화계 한 편에서는 “한국 영화계에서 중요한 문제는 더 이상 해외 영화에 맞선 시장 확보가 아닌, 대기업 자본에 잠식당한 영화계 내부의 양극화 현상이다” 는 주장이 확대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한국영화 시장은 투자-배급-극장체인을 소유한 몇몇 대기업들에 의해 움직여 왔다.
그러나 멀티플렉스의 확산으로 늘어난 스크린 수의 혜택이 극장체인을 소유한 대기업이 투자, 배급한 영화에 집중되면서 영화의 다양성을 저해한 측면이 많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지난 1월26일 재정경제부는 정례 브리핑을 통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과 관련, 오는 7월1일부터 스크린쿼터를 146일에서 73일로 축소하기로 결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작년 11월 22일 국회 예결위에서 정동채 문화관광부 장관이 “스크린쿼터와 관련해서는 미국과의 FTA와 연계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광부의 공식입장” 이라며 “정부도 스크린쿼터를 유지해야 한다고 보고 대통령도 같은 생각이다”고 말한 지 불과 2개월 만의 일.
재경부의 갑작스런 스크린쿼터 축소 발표에 정치권 일각과 영화계는 즉각 반대 입장을 밝히며 정부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다.
영화인들은 연일 광화문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며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노무현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하며 축소 방침이 취소되지 않을 경우 정권 퇴진 운동을 불사하겠다는 강경 노선을 취했다.
<충무로, 대기업 자본 아래 ‘헤쳐 모여'>
그동안 스크린쿼터는 헐리우드를 비롯한 외국영화의 지나친 시장 잠식을 막는 한편, 자국영화의 시장 확보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유지돼 왔다.
그러나 최근 스크린쿼터 축소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에 영화계 한편에서는 또 다른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영화사 관계자는 “지금 한국의 영화계가 직면한 문제는 한국영화와 외화의 대결이 아니라 큰 영화 대 작은 영화라는, 영화계 양극화 현상이다” 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한국 영화 시장 구조는 소위 몇몇 재벌기업들의 자본이 투자, 배급, 극장체인까지 소유한 형태로 지금 당장 극장에 가보면 자사 관련 영화들이 5~6개 이상의 상영관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마이너 배급사의 관계자는 “솔직히 작은 규모 배급사의 경우 스크린 확보 자체가 어려울 만큼 대기업 멀티플렉스 극장체인의 힘이 막강하다”고 사정을 털어놨다.
이어 이 관계자는 “이미 메이저 빅3로 불리는 대기업 아래 투자-배급-극장의 수직계열화가 된 시점에서 스크린쿼터가 축소된다고 해도 당장 외화수입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며“서로 한발자국도 양보하지 않겠다고 버티기 보다는 영화계와 정부가 모여 앞으로의 대책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고 덧붙였다.
지난해 9월 국정감사에서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정병국 의원은 “영화 제작과 배급, 상영에 이어 연예기획사 분야로까지 대기업이 진출하는 등 영화산업에 대한 대기업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확대되고 있다” 고 주장했다.
이어 정 의원은 “대기업 자본은 상업영화 외에 수익이 되지 않는 작품은 투자나 배급, 상영을 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중소 제작자에 대한 정책지원 등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계는 지난 90년대 중,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대기업 위주로 재편돼, 현재 한국 영화 시장은 이른바 메이저 빅3로 불리는 CJ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롯데엔터테인먼트가 주도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풍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투자, 배급, 멀티플렉스 극장체인까지 수직계열화를 이뤘다.
CJ엔터테인먼트는 CGV를, 롯데엔터테인먼트와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는 각각 롯데 시네마와 메가박스를 소유하고 있다.
이들 업체의 스크린 점유율은 23.7%이지만 관객점유율은 50% 가까이에 이른다.
지난 2004년 3월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1천만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며 영화계 흥행신화를 다시 썼을 당시 영화계와 관객은 '한국 영화의 쾌거'에 박수를 보내며 축제 분위기였지만 한편에선 ‘관객 1천만 돌파’의 역기능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많은 전문가들이‘영화의 다양성 실종’을 걱정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실미도’는 한때 390개 스크린(상영관)을 장악했고, ‘태극기 휘날리며’는 518개 스크린을 점유했다.
전국 스크린 수가 1천270여개인 것을 감안하면 한 동안 두 영화가 60% 이상의 스크린을 차지한 것이다.
이 때문에 ‘작은 영화’ 들은 개봉관을 잡지 못해 발을 굴러야 했고, 일부는 개봉을 늦추거나 혹은 어쩔 수 없이 교차상영에 만족해야 했다.
최근 영화 ‘홀리데이’ 조기종영, 재상영, 재종영 등 일련의 사태 역시 한국 영화 시장이 대기업 자본에 얼마나 좌우되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 준 사건이었다.
거대 투자 배급사들끼리도 이렇게 밀고 당기는 파워게임을 벌이니 흥행성이 낮은 작은 영화들이 멀티플렉스 극장에 맘 놓고(?) 진입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현실.
한 영화 관련 전문가는 ‘홀리데이’ 사건을 두고 “거대, 투자 배급사들끼리의 파워 게임은 지엽적인 부분이다” 며 “선택의 기회가 박탈된 관객과 극장 망을 등에 업지 못한 중소 투자, 배급사들의 불이익이 훨씬 심각한 문제” 라고 지적했다.
<메이저 빅3 ‘영화계 대기업 자본, 관객1천만 일등공신?’>
물론 거대 배급사와 멀티플렉스 극장이 한국 영화 발전에 긍정적 역할을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영화진흥위원회 한 관계자는 “헐리우드 메이저에 대항할 수 있는 한국의 메이저의 존재를 평가해줘야 한다”며 “지금까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와 맞서 한국 영화시장이 양적, 질적으로 성장한 데에는 대기업 자본이 큰 역할을 해왔다” 고 주장했다.
해당 기업 역시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에 억울하다는 반응이다.
롯네 시네마의 한 관계자는 민감한 사안에 대한 발언을 꺼리면서도 “한국 영화계가 일부 대기업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것에 부정적 시각이 있을 수 있다” 면서 “하지만 역기능보다 순기능이 더 많았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생기면서 관객들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것이 관객 증가를 가져오지 않았나” 고 말했다.
즉 한국영화 천만 관객 동원의 기록도 최근 3~4년 사이에 멀티플렉스가 성장하면서 가능해지 결과라는 것.
CJ 엔터테인먼트의 관계자는 좀 더 강한 어조로 “스크린쿼터 축소 논란이 한창인 현 시점에서 영화계 빈익빈 부익부 논의는 본질적 문제가 될 수 없다” 고 주장하며 “대기업 자본이냐 아니냐가 스크린쿼터 찬반의 잣대가 아니다” 고 말했다.
또 “작은 배급사가 반드시 ‘작은 영화’를 대변한다고 볼 수도 없지 않느냐” 고 반문했다.
한편 CJ엔터테인먼트 또 다른 관계자는 “대기업 자본이 오로지 잇속만을 챙긴다는 일부의 주장은 옳지 않다” 며 “자본의 건강한 선순환 과정이 회사(CJ)에 있어서도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이 관계자는 “사실 CJ를 비롯한 몇몇 대기업이 엄청난 수익을 거두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한국 영화 시장의 상황을 모르는 얘기다” 며 “미국의 경우 TV, 비디오, DVD 등 부가판권 시장이 극장에 육박할 만큼 커 다양한 수익원이 있지만 우리나라 영화시장은 오로지 극장 수익에만 의존하는 상황이다" 고 설명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정부는 현실성도 없는 무의미한 대책을 내놓을 것이 아니라 향후 영화시장에서 부가 판권을 키우는 일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고 주장하며 “부가 판권 시장이 확대돼 그로 인한 수익이 영화계로 돌아오는 자본의 재투자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고 주장했다.
<첨예한 극장 부율 조정 ‘극장도 빈익빈 부익부’>
한편 스크린쿼터 축소가 발표된 지 하루 만에 문광부는 서둘러 후속 대책을 내놓았다.
정동채 문광부 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 4천억원의 영화발전기금을 조성 ▲ 영화 현장 인력 처우 개선 ▲ 배급사와 제작사의 수익 배분율 개선▲ 영화의 세제 혜택 부여 등 다양한 지원 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문광부가 ‘대책’이라고 내놓은 방안들은 오히려 영화계 안팎의 거센 비난만 가져왔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극장 부율 조정. (극장과 배급사의 수익 배분 비율)
후속 대책을 발표하며 정 장관은 “한국영화 역시 외화와 마찬가지로 6대4 부율을 갖도록 할 것”이라는 발언을 했는데 이것이 정부-극장-제작. 배급사 간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현재 한국영화의 극장 부율은 지방과 서울 모두 5대5로 배급사와 극장이 똑같은 수익을 가져간다.
반면 외화의 경우에는 서울과 지방에 차이가 있어 지방은 5대5, 서울은 6대4다.
영화 배급사들은 6에 해당하는 부분을 다시 수입사(외화의 경우), 투자, 제작사에 나눠 주게 된다.
그런데 정 장관의 발언 이후 서울시극장협회는 오히려 외화에 대한 부율을 현행 6(배급) 대 4(극장)에서 5대 5로 조정해 극장 수입을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최근 극장협회는 이 같은 내용의 공문을 외국영화 직배사를 비롯, 외화 수입, 배급사들에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극장 부율 조정 문제는 제작사, 투자·배급사, 외화 수입사, 극장 등 관련 당사자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민감한 사안이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극장체인이 매년 몇 백억씩 수익을 올리고 있는 반면 제작사는 편당 평균 몇 억 원씩 손실이 난다”며 “극장만 돈을 버는 구조는 바뀌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내의 경우 투자와 배급, 제작의 주체가 뒤섞여있는데다 메이저 투자·배급사인 CJ㈜, 쇼박스㈜미디어플렉스, 롯데엔터테인먼트가 멀티플렉스 극장까지 소유하고 있어 대립관계가 단순하지가 않다.
물론 이들 메이저 빅3는 부율 문제가 민감한 사안이니 만큼 일단 공식적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자제하는 분위기다.
엄밀히 따져 현재 영화계에서 돈을 버는 곳은 CGV 롯네시네마, 메가 박스 등 이른바 멀티플렉스 극장이다.
투자-배급- 극장을 갖춘 이들 기업의 캐시카우는(확실한 돈벌이가 되는 사업) 단연 극장사업.
CJ엔터테인먼트 한 관계자는 “솔직히 투자나 배급으로 수익을 올리는 일은 거의 없다”면서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경우도 많지만 당장의 투자가 돈이 된다는 생각보다는 10년, 20년 후를 바라보고 사업을 하는 것이다” 고 설명했다.
그러나 몇몇 멀티플렉스를 제외하고 많은 수의 극장들은 관람객 수 감소, 각종 카드할인에 대한 수수료 부담 등으로 수익성이 악화되는 실정이다.
극장업계에서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 것이다.
한 극장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요 몇 년 사이 멀티플렉스 극장에 밀려 상영관이 2~3개에 불과한 소규모 극장은 문을 닫는 일이 많아졌다”면서 “극장이라고 다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고 하소연했다.
현재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이 스크린쿼터 축소는 이미 돌이키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많아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6일 “국내 이해단체의 저항 때문에 한. 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에 못 가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하자”며 “스크린쿼터 문제는 ‘어린 아이는 보호하되 어른이 되면 독립하는 것 아니냐”면서 “한국영화가 어느 수준인지 스스로 판단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같은 날 권태신 재경부 차관은 “영화소비의 선택권은 소비자에게 맡겨야 함 스크린쿼터 제도는 영화산업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자유무역협정과 관계없이 점진적으로 축소해야 한다” 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중요한 것은 축소 이후 영화계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그 시급한 일 중 하나가 대기업 자본에 쏠린 영화계 양극화 현상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문제라는 것.
취재 도중 들었던 한 마이너 배급사 관계자의 말은 영화계가 풀어야 할 양극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여실히 입증했다.
“이거 혹시 실명이 나가는 건 아니죠? 그럼 큰일나요. 어느 어느 배급사 누구라는 얘기가 공개되면 우리 영화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상영도 못 해요”
kyoung@sisaseoul.com
<심층취재 실시간 뉴스 매일일보/www.sisaseoul.com/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