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전성기 맞은 전경련…“왜?”
MB정부 출범과 역대 최고수준 ‘회장단회의’ 출석률의 상관관계
2010-04-05 김경탁 기자
[매일일보=김경탁 기자] ‘정경유착’이라는 잊혀진 시사용어가 살아나려는 걸까? 재벌기업 총수들의 결사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가 과거의 위상을 회복한 분위기다. 국내 주요그룹 총수들이 참석하는 전경련 회장단 회의가 2개월에 한 번 꼴로 열려 빈도가 잦아졌으며, 동시에 그룹 총수들의 출석률도 역대 최고 수준이다. 이전까지 참석자 수가 10명을 채우기도 쉽지 않았던 반면, 최근에는 평균 13명 이상이 참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석률 추이를 거슬러 살펴보면, 올해 3월 회의 13명, 1월 15명, 2009년 11월 13명, 9월 12명, 5월 14명, 3월 13명, 1월 10명, 2008년 11월 12명, 9월 13명, 7월 10명, 5월 11명, 3월 16명, 1월 14명, 2007년 9월 9명, 5월 11명이었다. 2007년 5월 회의는 조 회장 취임 후 첫 회의였다. 선대인 강신호 회장 시기를 보면, 강 회장이 주재한 마지막 회장단 회의였던 2006년 9월 회의에는 강 회장 본인과 조건호 상근부회장을 포함해 8명이 참석했고, 그 직전 회의였던 같은 해 1월 회의에 10명, 다시 그 전 회의인 2005년 10월 회의에 9명이 참석했다. 강신호 회장 재임 기간에 열린 회장단 회의 중에는 종종 최대 15명이 참석하는 회의도 있었지만 5명만 참석(2004년 6월)했거나 아예 참석자 명단 자체를 발표하지 않은 회의(2005년 1월)도 있었다. ※ 전경련은 참여정부 출범 초기인 2003년 3월부터 홈페이지에 회장단회의 발표문을 게재해왔는데, 2003년 3월 회의부터 2004년 5월 회의까지 6번 회의에 대해서는 참석자 명단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러한 변화는 2007년 3월 조석래 효성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을 맡은 이후의 변화로, 조 회장의 사돈인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조 회장이 재계의 대정부 창구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평가다. 또한 이명박 대통령은 대선 공약인 경제살리기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재계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고, 특히 이명박정부가 구상하는 경제성장 모델이 대기업 중심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전경련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전경련은 매년 회장단회의 때마다 경제현안에 대한 재벌기업들의 입장을 발표하고 있으며, 사회이슈에 대해서도 자주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재계의 요구가 고스란히 정책에 반영된 사례도 많다. 특히 이명박정부가 정권의 명운을 걸고 추진하고 있는 세종시 성격변화와 4대강 개발사업 추진은 이명박 정부와 재벌그룹의 잇속이 맞아떨어지는 분야이고, 수도권 그린벨트 해제의 경우 재계가 청원하기도 전에 이 대통령이 먼저 이슈화한 일도 있다. 그로 인해 전경련이 3월 31일 발표한 「2010년 규제개혁 체감도 조사분석」발표에 따르면, 정부의 규제개혁성과에 대해 국내 주요 기업들의 39.1%(261개사 중 102개사)가 ‘만족한다’고 응답했다. 이는 2009년 2월, 현 정부 1년 평가(27.1%)때 보다 12.0%p 높아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경련으로 대변되는 재계의 욕심은 끝이 없어 보인다. 전경련은 3월31일 발표한 이 보고서 관련 보도자료의 제목을 “경제계, 정부 규제개혁 갈길 멀다 느껴”라고 달았다. 수도권 공장 신·증설 규제 대폭 완화, 출총제 폐지 등의 입법조치가 완료된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됐으나 비정규직 고용, 해고요건 완화 등의 노동·고용 분야 규제개혁에 대한 기업 만족도는 17.6%로 낮은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향수와 전경련
‘자발적 의지’에서 ‘부정축재자 1호 출신 초대 회장’까지의 거리
전경련은 홈페이지 자기소개에서 “1961년 민간경제인들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 설립된 순수 민간종합경제단체로서 법적으로는 사단법인의 지위를 갖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 설립된’이라는 문구는 오히려 전경련 설립배경에 대해 묘한 뉘앙스를 느끼게 한다. 5․16쿠데타가 있었던 1961년 8월 탄생 시부터 ‘재벌들의 이익단체’라는 성격을 갖고 있었던 전경련의 초대 회장은 당시 군부에 의해 ‘부정축재자 1호’로 낙인 찍혔다가 풀려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였다. 그리고 전경련이 설립된 이후 1998년 헌정사상 첫 정권교체 이전까지 각 그룹별로 대통령에게 상납할 헌금(?)규모를 할당․모집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박정희 정권과 전경련의 이러한 인연은 지난해 12월 전경련 사회협력본부가 조석래 회장 명의 공문을 대기업 및 4대 은행에 보내 ‘박정희기념사업관’ 건립에 필요한 돈을 최소 10억원에서 수십억원까지 보내달라고 요청한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전경련이 각 기업들에게 보낸 공문에는 기업마다 모금액이 할당돼있고, 계좌번호까지 적시돼 있어 기업입장에서는 사실상 거부하기가 쉽지 않은 성격의 모금으로 받아들여졌다. 전경련은 박정희 기념사업관 건립 추진 초기에도 거액을 희사해 구설에 오른 바 있다. 박정희기념관 건립은 김대중 대통령의 공약사업으로, 1999년 7월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가 설립되면서 시작됐다. 당시 정부는 사업추진이 부진하거나 정해진 기부금을 조달하지 못하면 국고보조금 교부를 취소하는 조건으로 총 예산 709억원 가운데 기부금 500억원을 뺀 나머지를 국고로 충당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후 4년 동안 100억원 모금에 그쳤고, 100억원중 개인모금액은 10억원에 불과한 반면, 전경련이 50억원 대한상공회의소가 10억원 등 경제단체 및 기업에서 받은 모금액이 대다수를 차지해 일반 국민들에게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결국 참여정부 때인 2005년 3월 교부 결정이 취소됐고, 이후 재판을 통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인 지난해 4월 대법원에서 교부 취소는 부당하다는 판결이 확정됐다. 이후 기념관 건립사업을 전경련이 주도하는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