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탄생 100주년 ③] 현대 역사 68년, 한국경제 버팀목 ‘우뚝’
2000년까지 24년간 재계 1위 굳건…경영권 분쟁 등으로 분리
현대차그룹·현대중공업그룹·현대그룹 등 각 분야서 여전히 선도
2016-11-24 최수진 기자
[매일일보 최수진 기자] 가난이 싫어 10대의 나이에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성공을 꿈꾸며 도전과 성공, 실패를 반복했던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정신은 68년째 ‘현대’의 이름으로 이어지며 한국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정 명예회장은 무작정 상경해 쌀가게에서 일하며 신용을 쌓았다. 이후 쌀가게를 인수하고 경일상회로 처음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자동차 수리공장 사업과 건설보수업 등 다양한 사업을 시작했다.1947년 현대건설의 전신인 현대토건사를 설립했고, 1950년 정 명예회장은 자동차 수리공장인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현대그룹의 본격적 역사가 시작된 것.현대그룹은 다른 기업들이 소비재사업을 시작한 것과 달리 건설업부터 시작해 자동차, 조선 등 중공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현대건설은 6·25 전쟁 당시 미군 하청공사에 동원되면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제1한강교 공사 등 전후 복구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입지를 강화했다.현대건설은 1965년 국내 최초로 해외건설을 수주하기도 했다. 이후 잇따라 동남아·중동 등으로 해외 진출을 가속화 하며 한국 건설업의 해외 진출 물꼬를 텄다. 이 같은 해외 건설을 통해 얻은 막대한 오일머니는 정 명예회장이 다양한 사업에 진출하는데 밑바탕이 됐다.해외 진출을 통해 얻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1970년 완공된 경부고속도로의 5분의 3을 2년 5개월 만에 완공하기도 했다.정 명예회장은 1967년 미국의 유명 자동차 브랜드인 포드와 기술제휴를 맺으며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 완성차 사업에도 뛰어들었다.그러나 포드의 해외 시장 제제, 경영권 참여 등 간섭이 잦아지자 정 명예회장은 포드와의 제휴를 중단하고 독자 기술 개발에 나서며, 1976년 순수 국산 자동차 1호인 ‘포니’를 생산했다.자동차 제조업과 동시에 정 명예회장은 조선 사업에도 진출했다. 1972년 조선소 건립과 동시에 26만t급 유조선 2척 수주의 쾌거도 이루었다. 이듬해 정 명예회장은 현대조선중공업(현 현대중공업)을 설립했으며, 현대미포조선소 사업을 개시하는 등 조선사업을 확장해 나갔다.또한 정 명예회장은 현대상선의 전신인 아세아상선을 설립해 해운업에도 진출했다. 대형 유조선 3척으로 창립 첫해 대규모 흑자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이 외에도 현대그룹은 현대제철의 전신인 인천제철을 인수해 철강사업에도 진출했으며, 전자, 기계, 엔진 등 다양한 부문에 걸쳐 진출했다.1971년 1월 정 명예회장이 초대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해, 현대그룹은 1977년부터 2000년까지 24년간 한국 자산총액기준 재계 서열 1위의 대규모 기업집단을 유지해왔다.그러나 2000년 경영권 분쟁으로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그룹 등 분리되며 현대그룹의 재계 순위는 급락하게 됐다.그럼에도 정 명예회장의 정신은 여전히 각 분야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글로벌 5위의 세계적인 완성차 업체로 발돋움했으며, 글로벌 4위로의 약진 목표로 바삐 움직이고 있다.현대중공업은 명실상부 세계 최대 조선사로 뛰어난 기술력으로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현대상선 역시 세계 유수의 해운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글로벌 해운 얼라이언스를 구성하고 있다.최근 현대중공업과 현대상선 등이 세계 경기 불황에 적자를 기록하며 경영 위기에 직면했지만, 이들은 입을 모아 “정주영 창업주의 정신을 본받아 위기를 극복해 내겠다”며 대대적인 구조조정 및 긴축경영으로 경영정상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