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정영 칼럼> “역사는 勝利者의 기록이다”

2010-05-20     나정영 대표기자/사장

[매일일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수많은 학자들이 화답을 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국의 역사학자 E.H 카(1892-1982)가 대답했던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답은 약간 추상적으로 들린다. 이 대답보단 “역사란 승리자의 기록이다” 라는 말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한 이야기라는 설도 있지만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 이야기와 딱 맞아 떨어지는 일례가 있다. 바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의자왕과 ‘삼천궁녀’에 대한 기록이다.

백제의 무왕에 뒤이어 등극한 의자왕(재위 641~660년)은 일반인들에게 ‘삼천궁녀’ 이야기 덕분에 ‘한국 최고의 난봉꾼’이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다르다. 백제는 새로 즉위한 의자왕을 앞세워 신라 선덕여왕으로부터 무려 40여 성을 한꺼번에 빼앗는 대승을 거두었다.

백제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사건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무왕이 재위 42년 동안에 신라로부터 단 하나도 빼앗지 못한 것을 의자왕은 재위 한 달 사이에 모두  빼앗아버린 것이다. 

신라로 보면, 의자왕의 등장은 껄끄러운 사건이었을 것이다. 오죽 급했으면 선덕여왕이 당태종(재위 626~649년)에게 급히 사신을 파견해 도움을 요청했다. 신라 조정의 긴박한 분위기를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이러다 보니 김부식이 사대주의 입장에서 기전체로 기술한 ‘삼국사기’는 의자왕에 관해 많은 왜곡을 해 놓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의자왕이 통치 후반기에 갑자기 ‘음주가무’에 빠져 삼천궁녀를 거느리고 놀았다가 백제가 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망한 진짜 이유는 의자왕의 왕권강화에 반대한 귀족들의 반목과 배신 때문이었다. 그것이 의자왕을 패망의 군주로 몰아넣었다.

의자왕이 당나라에 끌려갈 때 백제의 모든 백성들이 그것을 바라보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의자왕이 평소 펼쳤던 자비로운 정치에 대한 진정한 백성들의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삼국사기’는 그러나 이런 의자왕의 자애로운 정치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다만 전쟁광에, 실패한 패망의 군주의 모습으로만 그려 놓았다.

‘삼국사기’의 의자왕 왜곡 하이라이트는 ‘삼천궁녀’가 낙화암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다. 신라와 백제의 마지막 한판 승부였던 황산벌에 출전한 백제 병사가 5천이었다.

백제 의자왕 때보다 인구가 훨씬 더 많았던 조선 영조(재위 1724~1776년) 때에도 궁녀의 숫자는 700명을 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건 너무나도 심한 비약이다.

또한 부여의 ‘낙화암’에 한번이라도 가 본 사람이면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궁녀들이 몸뚱이로 축대를 쌓아서 빠져 죽었다면 몰라도 낙화암은 ‘삼천궁녀’가 빠져 죽을 장소로는 너무 비좁다.

그냥 동네 개울 보다 조금 큰 곳에서 어떻게 삼천궁녀가 빠져 죽을 수 있었겠는가? 때문에 ‘삼천궁녀’ 운운하는 것은 코웃음이 나오게 하는 억지다. 

결론적으로 의자왕은 실패는 했지만 결코 지금처럼 욕을 먹을 군주가 아니었다. 백제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었고, 한때는 신라를 멸망시키려고까지 했다. 당의 야욕을 일찍부터 읽고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일본과의 외교력도 상당히 발휘한 위인이다.

다만 역사가 승자의 편에서 기술 된다는 점 때문에 의자왕은 후세에 삼국시대 최고의 ‘바람둥이’로 전락한 것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맞았다. 과연 몇 십년이 흐른후에 우리의 역사는 그분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할지 갑자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