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에버랜드 CB 편법증여 수사 어디로 가나
재판부 증거보완 요구... 이건희 회장에게 독이 될까 약이 될까
지난 20일 서울고법 형사5부(부장 이상훈)는 "1심 판결에 논리적 비약이 있었다"며 "기소된 허태학.박노빈 에버랜드 전, 현직 사장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보강증거를 내라"고 검찰에 석명권을 행사했다.
석명권이란 재판 도중 당사자 주장이 애매할 경우 재판장이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입증을 촉구하는 권한. 재판부의 태도는 현 단계에선 허씨와 박씨에게 유죄를 선고하기가 어렵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이를 두고 갖가지 해석과 관측이 엇갈리고 있다. 일단 재판부가 증거보완을 요구함에 따라 이건희 회장의 검찰 소환이 앞당겨지게 될 것이란 지적이 있다. 즉 재판부가 석명권을 행사해 사실상 그룹 윗선의 공모 관계를 검찰에 밝힐 것을 촉구한 것이므로, 이 회장 등 핵심 관련자에 대한 소환이 불가피하다는 것.
그러나 일각에서는 재판부가 무죄 선고의 심증을 갖고 정지작업을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이미 에버랜드 CB 발행이 이뤄진지 10년이 지난데다 검찰이 보강 수사를 통해 추가적인 사실을 밝혀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먼저 에버랜드 CB를 이건희 회장 장남인 이재용 상무 등이 헐값에 배정받는 데 전, 현직 사장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배임죄가 성립하려면 CB 발행과 주주들의 권한 포기 과정에서 피고들과 주주 사이에 공모가 있었는지 여부가 밝혀져야 하지만 이를 입증하는 내용이 없다" 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회사에 손해가 가능하다는 인식만으로 배임죄가 성립한다"면서 "이사회의 CB 발행 결의에도 하자가 있었고, 이재용 상무 남매가 전환가격 차액 상당의 이득을 취했고, 회사는 동액 상당의 손해를 입었다면 대법원 판례에 의해 유죄로 볼 수 있다" 고 항변했다.
검찰은 또 추가 자료를 제출할 것이 없고 주주들의 실권 과정은 입증이 어렵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그러나 재판부는 "1심 판결에는 다소 논리적인 비약이 보인다" 면서 "1심은 이 사건을 주주우선 배정을 가장한 3자 배정이라고 인식했지만, 그 판단이 맞는지는 따로 판단하겠다" 고 말했다.
검찰 행보.. 이 회장 소환 강수 둘까
검찰은 삼성그룹 '윗선' 차원에서 편법 증여를 위한 공모가 이뤄졌고, 비서실의 지휘를 받아 허씨와 박씨가 CB 발행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밝히거나, 주주들과 허씨, 박씨가 의사 교환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물론 검찰이 요구를 수용해 보강 수사를 벌일 경우 이 회장을 비롯해 삼성 오너 일가와 그룹 핵심 인사들을 소환해 직접 진술을 듣는 강수를 둘 가능성도 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검찰이 8월 초순 쯤 이 회장을 불러 조사한 뒤 공판 이전에 추가 기소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에 앞서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과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 또한 이 달 안으로 소환 조사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일부 언론을 비롯 시민단체 등에서는 재판부의 이번 증거 보완 요구가 반대로 에버랜드 CB 사건의 무죄 선고를 내리기 위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제기하고 있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한 관계자는 "지금 시점에서는 어떤 발언도 적절치 않다" 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이면서도 "재판부의 태도가 '무죄 선고를 위한 포석'이라는 일각의 해석은 충분히 가능하다" 고 우려를 나타냈다.
이어 이 관계자는 '법원이 그동안 배임에 대해 소극적 판단을 해 왔던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저런 해석들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검찰의 향후 행보다. 과연 재판부의 요구에 대해 검찰이 어떤 태도를 취할 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허씨와 박씨는 각각 에버랜드 사장과 상무로 일하던 지난 1996년 10월, 에버랜드의 자본금을 늘린다는 명목으로 100억원대의 전환사채 125만여주를 주당 7천700원에 발행했다.
이 가운데 96억원어치를 이재용 상무 등 이 회장 자녀 4명에게 넘긴 혐의를 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제일제당을 제외한 중앙일보, 삼성물산 등 에버랜드 기존 주주였던 삼성 계열사들은 배정받은 전환사채를 뚜렷한 이유없이 포기해 결과적으로 이 상무 남매의 지분 인수를 도운 것으로 드러났다. 1심에서는 둘 다 유죄가 인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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