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세계기록유산 '훈민정음(訓民正音)'
2017-07-06 김종혁 기자
이 책의 명칭은 '훈민정음'보다 '훈민정음(해례본)'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1443년(세종 25년) 겨울에 세종이 창제한 문자 '훈민정음'과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훈민정음(해례본)은 1446년 음력 9월에 간행된 1책의 목판본으로, 새로 만든 문자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과 이 문자의 음가 및 운용법, 그리고 이들에 대한 해설과 용례를 붙인 책이다.세종이 직접 작성한 ‘예의(例義)’ 부분과 정인지(鄭麟趾)를 비롯하여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강희안(姜希顔)· 이개(李塏)· 이선로(李善老) 등 8명의 집현전 학자들이 만든 ‘해례(解例)’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그 동안 이 책의 서명을 문자 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부르거나, 또 해례가 붙어 있고 '훈민정음(언해본)'과 구분하기 위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 등으로 구분해 왔다.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는 '훈민정음(해례본)'은 국보 제71호로 지정돼 있는 '동국정운'과 함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주촌의 이한걸(李漢杰) 씨 댁에 전래되던 것이다.1940년에 발견될 당시 원 표지와 첫 두 장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는데 그 후 보충하여 끼워 넣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 세종 서문의 마지막 글자 ‘이(耳)’가 ‘의(矣)’로 잘못 씌어지고, 구두점과 권성이 잘못되었거나 빠진 것도 있다.이 책에는 구점(句點; 右圈點)과, 두점(讀點; 中圈點) 및 파음자(破音字)의 성조를 표시하는 권성(圈聲)을 정확하게 표시한 책이다. 구두점과 권성을 모두 표시한 것은 '성리대전(性理全集'(1415년)의 체재와도 일치한다. 최근에 이 책 외에 또 다른 '훈민정음(해례본)' 한 책이 경북 상주에서 발견된 바 있다.'훈민정음(해례본)'은 목판본으로 1책이다. 전체 장수는 33장이다. 그 가운데 세종이 직접 쓴 예의 부분이 4장이고, 집현전 학자들이 쓴 해례 부분은 29장으로 돼 있다.실제로 이 책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예의 부분과 해례 부분의 장차 표시가 각각 제1장부터 4장까지, 그리고 해례는 다시 제1장부터 29장까지 장차를 따로 매기고, 판심제(版心題)도 달리 새겨 놓은 것을 알 수 있다.예의 부분의 판심제는 ‘正音’이고, 해례 부분의 판심제는 ‘正音解例’이다. 예의가 4장 앞면에서 끝나고 4장의 뒷면이 공백으로 되어 있는 이유와, 해례가 시작할 때 제1장 앞면 맨 앞에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라는 내제명(內題名)을 다시 갖추고 있는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이 책은 체재상 예의 부분과 해례가 독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글자도 크기를 달리 하여, 임금이 작성한 부분은 큰 글자로, 신하들이 작성한 부분은 작은 글자로 판을 새겼다.예의는 1면이 7행에 매 행(每行) 11자로 되어 있고, 해례 부분은 1면 8행에 매 행 13자이다. 정인지의 서문은 다시 한 글자를 낮추어 적고 있다. 이러한 '훈민정음(해례본)'의 체재는 본문과 해설을 짝지어 놓은 체재라고도 할 수 있다.세종이 쓴 예의를 큰 글씨의 본문으로 하고, 신하들이 쓴 해례 부분을 작은 글씨로 하여 그에 대한 해설로 짝지어 놓은 체재로 되어 있는 것이다.책의 체재나 내용상으로 볼 때, 정인지의 서문은 해례에 대한 서문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정인지의 서문은 해례의 용자례(用字例) 다음에 한 행의 공백도 없이 계속될 뿐 아니라, 장차도 이어서 매겨져 있고 판심제도 동일하게 ‘정음해례(正音解例)’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이 목판본의 밑바탕이 되는 판하본(板下本) 원고의 글씨를 쓴 사람은 세종의 셋째아들인 당대의 명필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이다. 따라서 이 책은 서예학의 측면에서도 아주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훈민정음'(해례본)의 체재예의(例義)는 세종의 훈민정음 서문과, 새로 만든 문자 훈민정음의 음가 및 그 운용법에 대한 간략한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예의’라는 말은 정인지의 해례 서문에 나온다. “계해년(세종 25년, 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어 간략히 예와 뜻(例義)을 들어 보이시고서 이름 하시기를, ‘훈민정음’이라고 하셨다.(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二命局,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하는 데에 들어 있다.세종의 서문에서는 새 문자 훈민정음을 만든 목적과 취지를 밝혔다. 이 서문은 54자로 되어 있다. 그 뒤를 이어, 초성자와 중성자의 음가를 밝혔다.초성자는 아(牙)·설(舌)·순(脣)·치(齒)·후(喉) 음의 순서로, 그 각각은 원칙적으로 전청(全淸)· 차청(次淸)· 불청불탁(不淸不濁) 자의 순서로 17자를 배열하되, 병서(竝書)를 할 수 있는 글자 뒤에 전탁자 6자(ㄲ ㄸ ㅃ ㅉ ㅆ )의 내용을 추가하여 배열해 놓았다.해례는 제자해, 초성해(初聲解), 중성해(中聲解), 종성해(終聲解), 합자해(合字解)의 5해(解)와 용자례(用字例)의 1례(例) 및 정인지의 해례 서문으로 구성돼 있다.문자 훈민정음을 만든 원리에 대해 해설하고 설명하는 부분이 제자해(制字解)이다.그 다음으로 초성해와 중성해, 종성해의 순서로 해설하고, 초성·중성·종성의 세 글자를 합쳐 쓰는 방법을 해설한 합자해의 순서로 5해를 구성하고, 마지막으로 합자법에 의해 올바르게 구성된 단어에 대한 실례를 용자례에서 실제 단어 123개의 용례를 들어 보인 것이다.자못 논리적인 순서로 배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각 해가 끝난 뒤에는 ‘訣曰’(“비결에 이르기를”)이라 하고서 운문(韻文)으로 그 해의 내용을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다.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는 "성음(聲音)을 바탕으로 하여 그 이치를 다하였다(但而使聲音而極其理唯别)고 하면서 정음(正音) 28자는 상형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었다고 천명하고 있다.즉, 초성의 기본자 ㄱ(아음), ㄴ(설음), ㅁ(순음), ㅅ(치음), ㅇ(후음) 등은 발음기관을 상형하여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그 외의 글자들은 소리의 세기에 따라 획을 가하여 만들었다.다만, ㄹ과 ㅿ는 각각 혀와 이의 꼴을 본떴으되 몸이 달라 가획의 의미가 없다고 했다.중성의 세 기본자 ㆍㅡㅣ는 천·지·인을 상형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합자해에서는 초성·중성·종성의 세 소리가 합쳐 글자를 이루는[成字]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정인지의 해례 서문은 전통적인 언어관인 풍토설(風土說)에 입각하여 풍토에 따라 말과 소리가 다름을 지적하고, 우리나라에서 한자를 빌려 썼으나 우리 문자가 아니므로 우리말에 맞지 않으며 신라 설총이 비로소 만들었다는 이두도 한자를 빌려 쓴 것이라서 한자 못지않게 불편하여 훈민정음을 새로 만들게 되었다는 경위를 나타내고 있다.또한 훈민정음 28자가 아주 교묘하여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안에는 깨우칠 수 있는 문자라고 밝히고 있다. 이 새로운 문자를 가지고 첫째, 한문을 풀이하여 뜻을 쉽게 알 수 있고 둘째, 송사(訟事)를 들어 그 사정을 알 수 있으며 셋째, 자운(字韻)의 경우 청탁을 잘 구분할 수 있거니와 넷째, 악가(樂歌)의 경우 율려(律呂)를 극히 조화롭게 할 수 있는 등의 우수성이 있다고 하면서 모든 소리를 다 적을 수 있다고 했다.조선을 건국한 이후 세종 때에 와서는 국가의 기틀이 확고하게 안정되면서 여러 분야에 걸쳐 우리 것을 존중하고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키려는 기운이 충만했다.이런 기운이 우리말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일 즉,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까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자기 언어를 표현하기 위한 새 글자를 제정한 일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 문자를 만든 창제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는 경우는 없다.더구나 새로 만든 문자의 창제 원리와 그 음가와 운용법을 밝히고 그것을 해설한 책을 간행한 일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다. 훈민정음 즉, 한글은 매우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다.새로운 문자 훈민정음을 다루고 있는 '훈민정음'(해례본)도 그에 못지않게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저작물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학술사적으로나 문화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가치와 의의를 가진다.훈민정음은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자료출처=문화재대관, 공공누리집, 문화재청, 건국대학교박물관, 간송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