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을 만나다 제4대 세종,소헌왕후 합장릉 "영릉(寧陵)"
조선왕릉중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첫 합장릉(合葬陵) 형식
2017-07-14 김종혁 기자
-능의역사-
1446년(세종 28년)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했다.이 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했다.세조대에 들어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년)에 여주로 옮겨 왔다.여주로 천장하면서 원래의 영릉 터에 있었던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혔다.-영릉의 천장지 결정에 관여한 사람들-
예종실록 1468년(예종 즉위년) 9월 13일자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 등이 영릉에 가서 장지를 보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영릉 근방에는 쓸 만한 땅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이 수고했으나, 다시 가서 살펴보는 것이 좋겠는데, 다만 높은 곳은 필요하지 않다.” 했다고 기록돼 있다.이에 더해 예종실록1468년(예종 즉위년) 12월 1일자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상당군 한명회(韓明澮), 예조판서 임원준(任元濬), 한성부 윤 서거정(徐居正)을 불러서 지리서를 참고해, 영릉 산세의 길흉을 의논하게 하니, 한명회가 아뢰기를,
“옛 임강현의 터가 능침을 쓸 만한 땅입니다. 청컨대 거주하는 백성들을 옮기고 초목(草木)을 기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승정원으로 하여금 그 편부(便否)를 원상(院相)에게 물어 보게 하였다.
위와 같이 영릉을 정하는 데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인지, 한명회, 서거정 등이 참여했다
-세종대왕과 15세기 과학 발전시대-
-세종의 과학 장려 정책-
세종은 자유로운 연구 분위기를 조성하여 집현전 학자들에게 일종의 연구를 위한 안식년인 ‘사가독서(賜暇讀書)’제도를 두어 연구에 전념하게 했다.한편 기술혁신을 위한 지속적인 정책을 전개해 과학성과 실용성을 동시에 추구했으며 기술개발을 위한 거시적인 노력을 기울였다.기술 습득을 위해 인재를 뽑아 중국에 유학시키고 이들을 두뇌 집단화하여 공동연구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세종과 그의 아들 문종의 휘하에는 장영실, 정초, 정인지, 이천 등의 우수한 과학자들이 몰려들어 훌륭한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다.-조선시대 왕립 천문대 간의대-
-종, 징, 북이 울려 시간을 알리는 자격루-
자격루는 1434년(세종 16년)에 장영실 등이 제작한 물시계로서 종과 징, 북이 저절로 울리면서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를 부착한 것이다.자격루의 원리는 맨 위에 있는 큰 물그릇에 넉넉히 물을 부어주면 그 물이 아래의 작은 그릇을 거쳐, 제일 아래쪽 길고 높은 물받이 통에 흘러든다.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가 점점 올라가 미리 정해진 눈금에 닿으며, 그곳에 장치해 놓은 지렛대 장치를 건드려 그 끝의 쇠 구슬을 구멍 속에 굴려 넣어준다.이 쇠 구슬은 다른 쇠 구슬을 굴려주고 그것들이 차례로 미리 꾸며놓은 여러 공이를 건드려 종과 징·북을 울리기도 하고, 또는 나무로 만든 인형이 나타나 시각을 알려주는 팻말을 들어 보이기도 한다.<자료출처=문화재청,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