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을 만나다, 장례집행기구 "도감이야기"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 기관설치후 의궤에 따라 왕의 장례를 치뤘다
2017-07-14 김종혁 기자
[매일일보] 조선시대 국장은 나라의 큰 일 이었다. 왕이 승하하면 온 궁궐은 임금님을 잃은 슬픔에 잠기지만, 그와 동시에 왕의 장례인 국장(國葬)을 치르기 위해 일사분란하고 분주하게 움직였다.왕실을 중심으로 한 대소 신하들은 우선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이라고 하는 임시 기관을 설치하고, 각 기관에 관리들을 임명하여 업무를 분담하도록 했다.국장도감은 장례에 필요한 의물 설비와 제도 운영을 진행했다.빈전도감은 왕의 옥체를 모신 빈전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을 총괄했고, 산릉도감은 왕릉을 조성하는 일을 맡아 움직였다.각 기관에서는 국장을 치를 때마다 담당 업무 내용과 국장 준비 과정을 자세히 기술하여 의궤를 편찬했다. 그 기록은 매우 세밀하고 정교해, 조선시대 국장의 진행상황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좋은 자료임과 동시에 의궤 자체로도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조선시대 의궤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왕의 옥체에 관한 일을 담당, 빈전도감
‘빈전’이란 빈소의 높임말로서 국상 때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의 옥체를 모시는 곳이다. 따라서 빈전도감은 승하한 임금의 옥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한다.
옥체를 여러 종류의 옷가지로 감싸는 과정인 소렴과 대렴 절차에서 필요한 수의, 홑이불 등 각종 물품을 준비하고, 빈전을 차리는 절차를 총괄한다.
왕세자, 대군 이하의 왕자, 왕비, 왕세자빈, 내외명부, 종친과 백관에 대한 상복 준비 역시 빈전도감의 역할이다. 제조(提調) 3명, 도청(都廳) 1명, 낭청(郎廳) 6명 등을 두었는데, 제조 3명 중 1명은 예조판서가 맡고, 낭청 6명 중에 1명은 예조 낭청으로 임명하여 충당했다.발인에 필요한 의장 준비 담당, 국장도감
국장도감은 일반적으로 왕이 승하한 당일에 조직하고, 장례 뒤 우제가 끝날 때까지 약 5개월 동안 존속하며 국장 진행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과 문서들을 총괄 제작했다.국장도감 아래에는 일방, 이방, 삼방을 설치했는데, 일방은 왕의 옥체와 부장품 등 다양한 물품을 운반하는 가마와 그에 따른 부속품, 제구류를 주로 제작했다.이방은 길흉의장, 왕의 의복과 장신구, 명기 등을 제작했다.삼방은 시책, 시보, 애책 등과 만장, 제기를 제작했다. 총호사(摠護使) 1명, 제조 3명, 도청 2명, 낭청 6명, 감조관 6명 내외 등을 임명하여 업무를 수행하게 했다.제조 3명은 호조판서, 예조판서, 선공감제조로 구성했으며, 낭청은 예조낭청, 공조낭청, 선공감, 제용감의 관원을 임명해 충당했다.왕릉 조영에 관한 일을 담당, 산릉도감
산릉도감은 왕의 능을 조성하는 일을 맡은 기관이다.왕이 승하한 날로부터 보통 5개월 후에 있을 장례 의식 전까지 능의 조영을 마무리해야 했다.산릉도감이 설치되면 지관(地官)은 능을 조영할 지역을 가린다. 능을 어느 곳에 둘 것인가는 당시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 이를 두고 정치적인 대립이 생기기도 했으며,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훗날 천장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산릉도감의 당상관, 관상감의 영사, 제조, 예조의 당상관 등은 신중하게 능지를 결정하고, 회의를 거쳐 공사일정을 확정하고, 필요한 인력을 산정한 후 공사를 시작했다.능을 조영하는 과정에는 석물을 제작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흙을 다지고 풀을 뽑는 일, 정자각 등의 건물을 만드는 일 등이 포함되어 많은 인력이 요구됐다. 이 인력은 17세기 초까지 백성들에게 의무를 지워 부역의 형태로 조달했으나, 이후에는 인력을 모집하여 고용하는 형태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