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을 만나다 제5대 문종,현덕왕후 "현릉(顯陵)"

현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과 능침 두개를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園異岡陵) 형식

2016-07-15     김종혁 기자

[매일일보]

능의 구성 (동원이강릉 형식)

현릉은 조선 5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현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園異岡陵)의 형태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문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현릉의 능제는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랐다. 문종의 능 병풍석의 무늬는 이전의 영저와 영탁대신 구름무늬로 바뀌었고, 혼유석 받침대인 고석의 수량도 4개로 줄었다.

능침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를 배치하였고, 중계에는 문석인과 장명등이 배치돼 있다. 현덕왕후의 능침은 문종의 능침과 같은 상설로 조성하였으나 병풍석을 생략했다.

현릉 이후부터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임금의 치적이 국사(실록)에 실리기 때문에 굳이 세울 필요가 없다는 논의 때문이었다.

능의 역사

1452년(문종 2)에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수양대군(세조), 황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의 대신을 비롯하여 풍수지관이 현지를 답사하고 건원릉 남동쪽에 현릉을 조성했다. 처음 문종은 세종의 구 영릉(서울 내곡동 헌릉 서쪽) 근처에 묻히기를 원하였으나 자리가 좋지 않아 현재의 자리로 정했다.

현덕왕후 권씨는 문종이 세상을 떠나기 11년 전에 왕세자빈 신분으로 1441년(세종 23)에 먼저 세상을 떠나, 안산의 소릉(昭陵)에 모셔졌었다.

이후 세조 즉위 후 단종 복위 사건에 친정 어머니와 남동생이 연루되는 바람에 폐위됐다가, 1512년(중종 7)에 복위되어 다음 해인 1513년(중종 8)에 문종의 현릉 좌측 언덕으로 사후 72년만에 왕의 곁으로 능을 천장했다.

이 때 두 능 사이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이유 없이 저절로 말라 죽어 두 능 사이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문종(文宗) 이야기

문종(1414~1452)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첫째 아들로 1414년(태종 14년)에 사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세종이 즉위하자 1421년에 왕세자로 책봉됐고, 세종재위 말년에 부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기 시작했다.

대리청정기간에 문무 관리를 고르게 등용하고 언로를 자유롭게 열어 민정파악에 힘쓰는 등 나라의 안정화에 크게 기여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문종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말이 적고, 학문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문종은 천문에 능통하였으며, 측우기도 발명했다.

1450년에 조선 최초로 적장승계의 원칙에 따라 세종을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내에는 '동국병감(東國兵鑑)'이 출간됐고,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이 편찬됐다.

한편 병제(兵制)를 정비하여 3군의 12사를 5사로 줄인 반면, 병력을 증대시키고 각 병종을 5사에 배분했다. 그러나 1452년(문종 2년)에 경복궁 천추전에서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성현의 수필집  용재총화(용齋叢話)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문종이 세자로 있을 때 귤을 나무 소반에 담아서 집현전에 보낸 일이 있었다. 집현전의 학사들이 귤을 다 먹자 문종은 즉석에서 시를 짓고 이를 소반 위에 썼다.

향나무의 향기는 코에만 향기롭고 / 기름진 고기는 입에만 달구나 / 가장 사랑스런 동정의 귤은 / 코에도 향기롭고 입에도 달구나.

이를 본 집현전 학사들이 그 유려한 글씨와 문장에 감탄하여 이를 다투어 베끼고자 했다. 하지만 대궐에서 빨리 소반을 돌려보내라고 성화를 하는 통에 다 베껴 쓰지 못한 집현전 학자들이 소반을 붙들고 차마 놓지 못했다고 한다.

현덕왕후(顯德王后) 이야기-폐위 56년 만에 현재 능침으로 천장(옮김)-

현덕왕후 권씨(1418~1441)는 본관이 안동인 화산부원군 권전과 해령부부인 최씨의 딸로 1418년(태종 18년)에 홍주(충남 홍성) 합덕현 사저에서 태어났다.

1431년(세종 13년)에 세자 후궁으로 승휘(承徽)가 됐고, 양원(良媛)을 거쳐, 1437년(세종 19년)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됐다.

문종은 세자시절 1427년(세종 9년)에 김오문의 딸을 왕세자빈(휘빈)으로 맞이했다.

그러나 휘빈 김씨는 문종의 사랑을 얻기 위해 은밀한 술법을 쓰다가 발각되어 폐위됐다.

그 후 1429년(세종 11년)에 봉여의 딸을 왕세자빈(순빈)으로 맞이했다.

하지만 순빈 봉씨도 문종과의 잦은 갈등과 동성애 스캔들에 휘말려 폐위됐다.

그 후 세종은 세자후궁 중에서 왕세자빈을 간택하려 했는데, 이미 자식이 있고 후궁의 서열 중에 가장 높은 권씨를 의리상 왕세자빈으로 올려야 한다는 뜻을 밝혀 권씨를 왕세자빈으로 책봉했다.

그러나, 현덕왕후는 1441년(세종 23년)에 원손(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다음날에 경복궁 자선당에서 24세로 세상을 떠났다.

처음 경기도 안산에 왕세자빈묘의 형태로 조성했고, 문종이 즉위하자 현덕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소릉(昭陵)이라 불렀다.

 

단종복위 사건 연루돼, 폐위 파묘 수난

그러나 세조 즉위 후 단종복위 사건에 어머니 최씨와 남동생 권자신이 연루되어 체형되면서, 현덕왕후 역시 폐위되어 종묘에 신주가 철거되고, 능이 파헤쳐지는 수난을 당했다.

그 후 여러 차례 복위론이 있었으나 무산됐다가, 1512년(중종 7년)에 종묘 문종실에 홀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민망하다는 명분으로 폐위된 지 56년 만에 복위되어 종묘에 신주를 부묘하고, 능을 현재의 현릉 좌측 언덕으로 천장하게 됐다. 

<자료출처=문화재청,국립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