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와 정희왕후 능침 광릉에 얽힌 이야기
세조의 유언 따라 울창한 숲으로 조성
인근 마을 사람들이 왕릉 수호군 역할 수행
2017-07-18 김종혁 기자
'능 수호군'임무수행 광릉 인근 마을 주민
'예종실록' 1469년(예종 1년) 8월 13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일찍이 경기의 광주, 지평, 양근, 가평, 포천, 영평, 양주, 적성, 마전, 삭녕, 장단 등 여러 고을에서 유이(流移)한 백성들을 본 고을로 돌려보낸 뒤에 복호(復戶)하되, 포천현(抱川縣)의 백성은 광릉(光陵)의 수호군(守護軍)으로 이속시키고 경작하는 땅에 대한 공부(貢賦)를 감해 줄 것을 의논하여 아뢰라고 명하셨습니다.
-양주 백성으로서 수호군으로 소속된 자 42인의 공부도 포천의 예(例)에 따라 견감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나온다.
광릉 옆 수목원 이야기
조선 7대 임금 세조의 능인 광릉의 주위로 다양한 생물들이 자생하고 있는 울창한 숲이 형성돼 있다. 이 숲은 산림청의 연구기관에서 꾸준히 관리하다 1984년 광릉 수목원으로 조성됐으며, 1999년에 국립 수목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하고 있다.광릉뿐만 아니라 서울과 서울 근교의 조선 왕릉 부근에는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항상 푸른 숲이 조성되어 있어 도심 속의 쉼터로 기능하고 있다.산으로 겹겹이 에워싸인 능지
왜 조선 왕릉 부근에는 이렇게 항상 숲이 있을까? 우선 왕릉의 입지를 선정할 때에는 항상 풍수지리상의 길지를 고려했기 때문이다.풍수지리적 길지의 요건으로서는 여러 기능을 하는 산자락이 능침의 후면은 물론이고 좌우를 감싸는 지세가 필요하다.따라서 능역의 대부분이 자연 산림 공간으로 겹겹이 에워싸인 곳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에 더하여 능역에는 다양한 나무를 인공적으로 심어 조경을 했다.능침 공간과 제향 공간에는 잔디를 깔아 사초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동선을 따라 진달래 등의 꽃나무를 심고 연못 주변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특히 봉분의 좌우 및 후면에는 소나무를 심고, 전면의 낮은 지대에는 오리나무를 심는 것이 능침 공간 조경의 전형적인 방식이었다.광릉을 조영할 때, 능 조성의 전 과정에 대한 기록을 엮어 만든 '광릉지(光陵志)'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금천교를 지나 향로를 따라 좌우에 진달래를 수 백 그루 식재하고 재헌(재실) 북쪽 창문에까지 두견화를 수 백 그루 식재했다. 또 서쪽, 동구 십리의 길에는 수많은 전나무와 측백나무 혹은 잣나무를 심었다. 동쪽 동구 5리 정도의 길에는 전나무, 잣나무와 더불어 진달래를 서로 맞대어 심어 놓았다. 또 서쪽 담장 밑에 화훼류를 심어 무성하게 했다'는 기록이 나와있어 조선 왕릉의 산림이 얼마나 철저히 조성 및 관리됐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