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제9대 임금 성종, 정현왕후 선릉(宣陵) 공혜왕후 순릉(順陵)
2017-07-22 김종혁 기자
능의 구성
정자각 앞에서 바라봤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성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정현왕후의 능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이 배치돼 있다.
능의 역사
임진왜란 때 파헤쳐지는 수난 겪어
그 첫 수난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년)에 일어났다. '선조실록' 1593년 4월 13일자의 기사에는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쳐 재앙이 재궁에까지 미쳤으니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이 애통합니다.”라는 경기좌도관찰사 성영의 치계와 “이 서장을 보니 몹시 망극하다. 속히 해조로 하여금 의논해 조치하게 하라.”는 선조의 명이 기록돼 있다.1625년(인조 3년)에는 정자각에 불이 나고, 그 다음해에는 능침에도 불이 났다.성종(成宗) 이야기
성종(1457~ 1494)은 추존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의 둘째 아들로 1457년(세조 3년)에 경복궁에서 태어났다.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 의경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할아버지인 세조가 잠시 궁중에서 키웠는데, 성품이 돈후하고 서예와 서화에도 능해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1461년(세조 7년)에 자산군에 봉해졌고, 숙부 예종이 1469년(예종 1년)에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의 명으로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즉위 후 정희왕후 윤씨의 수렴청정을 7년 동안 받았으며, 1476년(성종 7년)에 친정(親政)을 시작했다.성종은 법령을 정리해 세조대에 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을 1485년(성종 16년)에 반포했고, 1492년(성종 23년)에는 '대전속록'을 완성해 유교적 통치의 전거가 되는 법제를 완비했다.세조 측근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 사림세력을 등용해 훈신과 사림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키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그 후 1494년(성종 25년)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38세로 세상을 떠났다.민심 살피러 궁궐 밖으로 변복 미행 자주나가
성종은 백성들이 사는 것을 둘러보기 위해 미행(임금이 변복을 하고 궁궐 밖에 나가 민정을 살피는 것)을 자주 했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성종이 궐 밖을 다니며 겪은 일화들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왔다.어느 해 겨울, 성종이 여느 때처럼 미행을 나갔을 때, 남산골 초라한 오막살이에서 글 읽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담은 무너지고 서까래가 썩어가는 누추한 곳이었는데, '춘추좌전'을 읽는 소리가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성종은 등불이 꺼져 불을 얻고자 한다는 핑계를 들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글을 읽던 선비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지은 문집을 읽어본 성종은 선비의 해박함과 그 문집의 명문에 깜짝 놀랐다.훌륭한 학식을 갖춘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어려운 살림을 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성종은 선비 몰래 쌀과 고기를 그 집에 보내고, 예정에 없던 과거령을 내렸다.그리고는 그 선비의 문집에서 본 글을 과제로 내걸고, 선비가 과거에 응시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선비의 문집에 있던 글이 제출되자, 성종은 더 살펴볼 것도 없이 그 글을 장원급제를 시켰다.그런데 글을 지은 사람의 이름이 그 선비의 이름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여겨 장원급제자를 들이라 하였는데, 주인공은 선비가 아닌 새파란 젊은이였다.자초지종을 묻자 젊은이는 “그 분은 저의 스승이었는데, 이번 과거를 꼭 보시려고 했으나, 며칠 전 굶주리다가 갑자기 먹은 고기 때문에 크게 병이 나서 돌아가셨다.”고 답하였다. 성종은 안타까움에 크게 탄식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정현왕후(貞顯王后) 이야기
연산군 친 아들처럼 키워, 후일 연산군도 예우 다해 모셔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된 이후 중전의 자리에 오른 정현왕후는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키웠고, 연산군 역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다고 한다.연산군은 즉위 후 성종의 능지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폐비 윤씨의 아버지 윤기견(尹起견)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고는, 자신이 친어머니로 알고 있던 정현왕후 윤씨의 아버지 윤호(尹壕)를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질 만큼 폐비 윤씨의 존재를 몰랐다.이 질문에 승지들이 비로소 윤기견과 폐비 윤씨에 관한 일을 아뢰었고, 연산군은 그때서야 자신의 친어머니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연산군일기' 1495년(연산군 1년) 3월 16일자 기사에는 “왕이 비로소 윤씨(폐비 윤씨)가 폐위되어 죽은 줄을 알고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연산군일기' 1504년(연산군 10년) 3월 20일자 기사에는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죽음에 연루된 귀인 정씨와 엄씨를 잔인하게 때려 죽인 뒤 장검을 들고 정현왕후의 처소로 들어가 “어서 밖으로 나오라”며 행패를 부린 기록이 있다.그러나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해치지 않았고, 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가 폐비 윤씨의 복위를 앞장서 반대했음에도 정현왕후에 대한 예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제9대 성종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 순릉(順陵)
능의 구성
비각에는 한 기의 능표석이 있는데 ‘조선국 공혜왕후 순릉(朝鮮國 恭惠王后 順陵)’이라고 새겨져 있다.
능침은 병풍석은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2쌍씩 배치했다.
능의 역사
공혜왕후(恭惠王后) 이야기
공혜왕후 한씨(1456~1474)는 본관이 청주인 상당부원군 한명회와 황려부부인 민씨의 넷째 딸로 1456년(세조 2년)에 연화방 사저에서 태어났다.예종의 첫 번째 왕비 장순왕후와는 자매지간이 된다.1467년(세조 13년)에 자산군(성종)과 가례를 올려 천안군부인에 봉해졌으며, 1469년에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됐다. 성종 사이에서는 소생을 낳지 못했으며, 1474년(성종 5년)에 창덕궁 구현전에서 19세로 세상을 떠났다.세상을 떠나기 전에 “죽고 사는 데는 천명이 있으니, 세 왕후를 모시고 끝내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순릉의 지석에는 공혜왕후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가 전한다. 왕후는 나면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였으며, 조금 커서는 온화하고 의순하며 숙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