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제10대 임금 연산군이야기 -상-

2016-07-25     김종혁 기자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역대 조선임금 가운데 조종(祖宗)의 칭호가 없는 임금은 둘이다. 그중 제 10대 임금 연산군의 이야기를 '임금이 되기 전' "임금 재위 중'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 세 편으로 나눠 살펴본다.

연산군 이야기

연산군(燕山君,1476~1506,재위 1494~1506)의 성은 이(李), 휘는 융(漋), 본관은 전주(全州) 성종의 장남으로 폐비 윤씨의 소생이며, 비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이다.

모후 폐비 윤씨의 폐출 이후 정현왕후의 손에 자랐으나, 훗날 자신의 생모가 폐비 윤씨임을 알게됐다. 그 뒤 어머니 폐비 윤씨를 왕비로 추숭하려 하자, 성종의 유명을 내세워 왕비 추숭을 반대한 사림파 문인들과 충돌하다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제거했다.

또한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빌미로 발생한 갑자사화에서는 사림파와 양대 파벌을 이루던 훈구파와도 절연하면서, 사림파를 적대세력으로 훈구파를 비호감세력으로 만들어 독단정치를 폈다.

국왕 보좌기관이던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예문관 등을 대폭 축소, 감원하고, 성균관과 원각사 (圓覺寺)를 기생 양성소와 유흥장으로 만들어 조선 건국초기의 여러 제도를 폐지하고 욕보였다.

그 밖에 민간 여자들과 양반가, 사대부가의 여자들을 자의 혹은 강제로 입궐시켜 추문을 일으키는등 치세 후반에는 방탕한 생활을 했다.

종친을 두고 파격적인 언행을 일삼는 한편 생모 폐비 윤씨의 사사에 관여했던 성종의 후궁들을 몽둥이로 때려 죽인뒤 그 시체를 들판에 짐승의 먹이로 내다버리게 했다.

인수대비의 초상 때는 인수대비가 3년상을 받을 사람이 못 된다 하여 3년상 대신 25일로 장례를 마쳐 유학자들의 비난을 초래 했다.

사림파의 증폭되는 불만(不滿)과 훈구파의 부당(不當)하다는 여론 속에 1506년 9월 중종 반정으로 폐위됐으며 강화군 교동도(喬桐島)로 유배됐다가 곧 그해 11월에 사망했다.

폐위됐기에 시호가 없으며 생존 때 받은 존호는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이다.

혈연으로는 진성대군(중종)의 이복 형이자 처고모부가 된다. 연산군은 오늘날 까지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지목되고 있다. 폐위 당시, 즉위 이전 적자의 신분이었으므로 군이 아닌 대군으로 강등되었어야 옳지 않았냐는 의견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단종이 폐위된 후 노산대군이 아닌 노산군으로 강등된 전례를 보면, 폐위된 왕은 적서에 관계없이 군으로 강등됨을 알 수 있다.

연산군은 조선 성종과 제1계비 폐비 윤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어날 때부터 왕비 소생의 장자인 원자(元子)로 불렸다.

그러나 후궁이 많았던 부왕 성종과 폐비 윤씨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고,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을 기회삼아 후궁들과 연산군의 할머니 인수대비는 윤씨를 왕비에서 폐하고 궁궐에서 축출하고만다.

날때부터 원자였던 연산군은 1483년(성종 14년) 세자에 책봉됐고, 허침(許琛)·조지서(趙之瑞)·서거정 등에게 학문을 배웠다.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는 연산군 외에 제2계비인 정현왕후 소생 진성대군(훗날의 중종)이 태어났으나 성종이 승하할 당시에는 세자 이융(연산군)의 나이가 18세였으므로 임금에 오르는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세자 시절

그는 어려서 생모인 폐비 윤씨가 아닌 계모 정현왕후의 아들로 성장했다. 일설에는 이후 폐비 윤씨의 소생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생모로 알고 자라다가, 성종의 묘비명과 행장을 쓸 때 제헌왕후 윤씨의 사사 사건을 알게 되면서 갑자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학살하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설도 있다.

성종은 특별히 허침, 서거정, 조지서, 정여창 등에게 세자를 가르치게 했다. 스승들 중 허침은 연산군에게 너그럽게 대한 반면, 조지서는 정해진 대로 가르치려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배우기를 아니 좋아하여 그 누구든 배우라고 타이르려 하면 "이제 그런것은 잡기(雜技)이다"라며 되려 타이르려 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허침은 연산군의 말에 동조하면서도 정해진 것이므로 배우라고 부드럽게 권했고 조지서는 '자꾸 제 말을 안 들으시면 상감마마께 고하겠습니다'라 하여 연산군과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연산군이 벽에 '허침은 성인이고, 조지서는 소인배'라는 낙서를 했으며 결국 연산군은 갑자사화때  조지서의 죄를 물어 죽였다.

연산군은 즉위 초,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고 변경지방으로 주민을 이주시키는 한편, 녹도(鹿島)에 침공한 왜구를 격퇴하고 건주야인을 회유 또는 토벌하는 등 국방에 주력했다.

즉위 초기에는 빈민을 돕고 국조보감(國朝寶鑑) 등 여러 서적을 완성시켰으며 국방도 튼튼히 했던 것으로 전한다. 연산군은 사창·상평창·진제창(賑濟倉)을 설치하여 빈민의 어려움을 덜어주었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부활시켰다.

국조보감은 조선역대 임금의 치적에서 모범이 될만한 일을 실록에 의거해 엮은 편년체의 역사책이다. 조선조 마지막 임금 순종때에 이르러 완성한 90권28책을 말한다.  

사가독서란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는 일을 말한다.  1426년, 세종8년에 시작해 세조때 없애기도 했다.

또한 '경상우도지도','동국명가집'등을 간행했고,'역대제왕시문잡저','속국조보감','여지승람'을 완성하는 등, 즉위 초에는 다수의 업적을 이뤘다.

즉위 직후 그는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외할머니 장흥부부인 신씨와 외삼촌 윤구를 석방한다.

즉위 이듬해 부터 어머니 폐비 윤씨를 왕후로 복권시키는 일을 추진한다. 그러나 사림에서는 '사후 백년간 폐비 윤씨 문제는 논외에 부친다'는 선왕의 유지(성종의 유언)를 이유로 들며 폐비 복권을 반대했다. 이 때문에 감정이 악화된 연산군은 사림파의 제거를 추진하면서 사화로 이어졌다. '연산군이야기-중편-으로 이어짐. <자료출처=문화재청,공공누리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