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1대 임금 중종의 왕비 장경왕후, 문정황후 능침 희릉(禧陵) 태릉(泰陵) <하>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조선 제11대 중종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와 셋째 왕비 문정왕후 능침은 희릉(禧陵)과 태릉(泰陵)에 모셔져 있다.
능의 구성
희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단릉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돼 있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했다. 무석인은 큼직한 이목구비와 당당하고 위엄 있는 자세로 칼을 쥐고 있으며 갑옷의 조각은 작고 섬세한 문양들을 촘촘히 새기고 있다.
문석인 역시 큼직한 체구에 맞게 홀 역시 크게 묘사돼 있으며 두 손을 노출시켜 맞잡고 있다. 소매의 안쪽으로 작은 소매가 한 번 더 돌아가는 이중 소매를 보여 주고 있다.
능의 역사
1515년(중종 10년)에 장경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의 헌릉(獻陵)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했다. 그러나 1537년(중종 32년)에 희릉 조성 당시에서 문제점이 있다는 김안로의 주장에 따라, 현재의 자리로 천장했다. 이후 1544년(중종 39년)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중종의 능을 희릉 오른쪽 언덕에 조성하면서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취하고 능호를 정릉(靖陵)이라 했으나, 1562년(명종 17년)에 중종의 능을 현 서울 강남구로 옮기면서 다시 희릉으로 부르게 됐다.
장경왕후(章敬王后) 이야기
장경왕후 윤씨(1491~1515)는 본관이 파평인 파원부원군 윤여필과 순천부부인 박씨의 딸로 호현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중종 1년(1506년)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 내명부 종2품)로 책봉됐다가, 중종의 첫 번째 왕비가 폐위되면서 이듬해에 왕비로 책봉됐다.
중종 사이에서 효혜공주와 인종을 낳았으며, 1515년(중종 10년)에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경복궁 동궁별전에서 25세로 세상을 떠났다.
제11대 중종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 태릉(泰陵)
능의 구성
태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씨의 능이다. 태릉은 왕비의 단릉(單陵)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웅장한 느낌을 준다.
능침은 '국조오례의'의 능제를 따르고 있어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병풍석에는 구름무늬와 십이지신을 새겼고, 만석에는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원래 십이간지가 문자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병풍석을 없애고 신상을 대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등장한 것인데, 태릉을 시작으로 신상과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다.
그 밖에 석양, 석호,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문무석인, 석마 등을 봉분 주위와 앞에 배치했다. 문석인은 두 손으로는 홀(笏)을 공손히 맞잡고 있는데, 왼편의 문석인의 경우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반면 오른편의 문석인은 그 반대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능침 아래에는 홍살문, 판위, 향·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됐으며, 정자각은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94년에 복원했다.
능의 역사
1565년(명종 20년)에 문정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 시호를 문정왕후, 능호를 신정릉(新靖陵)이라 했다가 산릉이 현재의 자리로 결정되면서 태릉으로 바꿨다.
원래 문정왕후는 남편인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을 원했다. 봉은사 주지 보우와 의논해 장경왕후(두 번째 왕비)의 능 옆에 있던 중종의 정릉을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현재의 선릉 동쪽부근으로 천장했다. 그러나 지대가 낮아 비가 오면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나는 자리였기 때문에 문정왕후는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했다.
문정왕후(文定王后) 이야기 -수렴청정중에 불교 중흥시켰으나 임꺽정의 난 일어나고 민중의 비난 벽서(대자보)가 나붙기도-
문정왕후 윤씨(1501~1565)는 본관이 파평인 파산부원군 윤지임과 전성부부인 이씨의 딸로 1501년(연산 7년)에 태어났다. 1515년에 중종의 두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517년(중종 12년)에 왕비로 책봉됐다.
당시 장경왕후의 아들인 인종이 왕세자로 책봉된 가운데 문정왕후가 경원대군(명종)을 낳자, 인종을 지지하는 대윤(大尹)과 경원대군을 지지하는 소윤(小尹) 간의 권력싸움이 있었다.
이 후 1544년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이 정권을 잡았으나, 인종이 재위 9개월만에 승하하고 경원대군(명종)이 1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소윤이 정권을 잡았다.
소윤은 의도적으로 대윤을 제거하기 위해 을사사화를 일으켰으며, 다시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대윤 및 사림을 완전히 제거시켰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에 정국은 불안정하여 매관매직이 빈번했고,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문정왕후는 불교에 관심을 두어 불교부흥에 앞장서 선교양종 및 승과제도를 부활시켰고, 보우를 가까이 하여 봉은사의 주지로 임명했다.
8여년의 수렴청정을 끝내고 명종이 친정했으나, 실질적인 권세는 문정왕후에게 있었다. 그 후 1565년(명종 20년)에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1547년(명종 2년) 경기 광주 양재역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이 권세를 휘둘러 나라가 망하려 하는데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벽보가 붙게 됐다. 여기서 여왕은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게 된 문정왕후를 일컬은 것이다.
이 벽보를 계기로 당시 학계와 정계에는 을사사화에 이은 큰 피바람이 몰아닥쳤다. 이와 같이 문정왕후와 왕후의 형제들인 윤원형, 윤원로는 집권 초기 자신의 반대파를 유배 보내거나 죽이는 등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
문정왕후 집권 시의 정치가 선비들에게 어떻게 비춰졌는지는 당시의 대 유학자 조식이 그에게 내려진 벼슬을 사양하면서 올린 상소에 잘 드러나 있다.
"자전(慈殿·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 가지의 재앙과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이러한 직설적인 상소에도 조식은 무사했다. 그러나 당대 문정왕후에 대한 위험한 언급이 금기가 될 정도로 커다란 권력을 거머쥐고 있었다.<자료출처=문화재청,조선왕릉연구소,공공누리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