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대 임금 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 목릉 (穆陵) 인빈김씨 순강원(順康園)

2016-08-01     김종혁 기자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목릉(穆陵)은 조선 14대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목릉은 같은 능역 안에 각각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능의 구성

선조의 능은 기본적인 왕릉상설에 맞게 조성되어 병풍석과 난간석, 혼유석, 망주석, 석양 및 석호가 배치돼 있다.의인왕후의 능과 인목왕후의 능은 병풍석만 생략했을 뿐 상설은 선조의 능과 같다.다만, 의인왕후의 능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처음 조성한 능이었기 때문에 석물들의 조각미가 다소 떨어지지만, 망주석과 장명등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이후 조선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정자각은 원래 의인왕후의 능 앞에 있었다. 그러다가 1630년(인조 8년)에 선조의 능이 천장되면서 기존의 목릉 정자각을 이건(移建)하게 되자 의인왕후 능 앞에 있던 정자각은 헐었다.목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다포식 공포로 지어진 건물로 보물 제1743호로 지정됐다.

능의 역사

목릉은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가 1600년(선조 33년)에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유릉(裕陵)이라는 능호로 조성됐다. 이 후 1630년(인조 8년)에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현 위치로 옮기고 의인왕후의 유릉(裕陵)과 목릉의 능호를 합하여 목릉이라 했다. 1632년(인조 10년)에 선조의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했다. 처음 혜릉(惠陵)이라는 능호를 정했다가 목릉과 합쳐 현재의 모습이 됐다.

선조(宣祖) 이야기

선조(1552~1608)는 중종의 아들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셋째 아들로 1552년(명종 7년)에 인달방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바르고 용모가 빼어나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 처음에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1567년(명종 22년)에 인순왕후의 뜻에따라 명종의 양자 입적후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인순왕후의 수렴청정을 8개월 동안 받았다. 선조는 훈구세력의 힘을 억제하고 이황, 이이 등의 인재를 등용해 선정에 힘썼다.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 등을 신원하고, 그들에게 화를 입힌 훈구세력의 관직을 추탈하여 민심을 수습했다. 그러나 명종 말년부터 일어난 붕당정치의 시작으로 정여립의 모반사건과 세자책봉 문제로 옥사가 일어났으며, 국력이 쇠약해져 국방대책을 세우지 못하던 중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임진왜란에 이어서 정유재란이 일어나 두 차례에 걸친 7년 동안 전쟁을 치르며 전 국토가 황폐화됐다. 선조는 전후 복구작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그 후 1608년(선조 41년)에 경운궁 석어당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인왕후(懿仁王后) 이야기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1555~1600년 )는 본관이 반남인 반성부원군 박응순과 완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1555년에 태어나, 1569년(선조 2년)에 왕비로 책봉됐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후궁의 자식들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폈다. 특히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을 친아들처럼 대해줬고, 훗날 왕세자의 자리에 오르도록 후원했다. 1600년(선조 33년)에 황화방 별궁(경운궁)에서 46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인왕후의 국장은 임진왜란 이후에 치룬 첫 번째 국장이었다. 이때는 전쟁 이후의 수습상황단계여서 묘를 옮기거나 철거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왕후의 산릉자리는 5개월 동안 정하지 못하다가  포천 신평에 산릉공사를 했다. 하지만 불길론이 일어나면서 공사를 중단하고, 건원릉 동쪽으로 장지를 다시 정했다. 세상을 떠난 지 7개월이 지난 1600년(선조 33년)에 국장을 종료했다.

인목왕후(仁穆王后) 이야기

선조의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1584~1632)는 본관이 연안인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광산부부인 노씨의 딸로 1584년(선조 17년)에 반송방,서울 아현동 일대 사저에서 태어났다. 1600년에 선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인 1602년(선조 35년)에 선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됐으며, 1606년에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낳았다. 당시 소북정권의 유영경(柳永慶)은 적통론에 입각해 적자인 영창대군을 왕위에 추대하려 했으나,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소북정원이 물러나고 대북정권이 들어서게 됐다.
광해군 즉위 후 왕대비가 됐으나, 1613년(광해 5년)에 계축옥사로 친정아버지와 영창대군이 옥사했다. 1618년(광해 10년)에 대비의 호칭을 삭탈하고  경운궁에 유폐됐다. 이 후 1623년에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다시 대왕대비의 지위에 올랐다. 1632년(인조 10년)에 인경궁 흠명전에서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추존 원종 사친 인빈 김씨 순강원(順康園)

원의 구성

순강원은 조선 14대 선조의 후궁이자 추존왕 원종의 사친인 인빈 김씨의 원이다. 원소의 구성은 왕릉의 형식과 비슷하게 조성했다.
진입공간에는 재실과 신도비각이 있으며, 그 밖에 금천교, 홍살문, 정자각, 비각은 왕릉의 형식과 같이 조성했다.

원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호석을 둘렀으며, 문석인, 석마, 장명등, 상석,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다. 원의 형식으로 무석인을 세우지 않았으며, 석양과 석호는 각각 한 쌍씩 배치됐고, 상석 양 옆에는 동자석이 배치돼 있다.

원의 역사

1613년(광해 5년)에 인빈 김씨의 묘소로 조성했다. 이 후 손자 인조가 즉위하고 1636년(인조 14년)에 신도비를 세웠다. 영조 대에 들어 사친으로의 추존제도가 성립된 후, 1755년(영조 31년)에 왕의 사친으로 추존되어 원호를 순강원이라 추봉하고 현재의 모습으로 단장했다.

인빈 김씨(仁嬪 金氏) 이야기

인빈 김씨(1555~1613)는 본관이 수원인 사헌부감찰 김한우의 딸로 1555년(명종 10년)에 태어났다. 선조가 즉위한 후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 심씨의 총애를 받아 1573년(선조 6년)에 숙원(淑媛)에 책봉됐다. 선조 사이에서 4남(의안군, 신성군, 원종, 의창군) 5녀(정신옹주, 정혜옹주, 정숙옹주, 정안옹주, 정휘옹주)를 낳았으며, 소용, 귀인을 거쳐 1604년(선조 37년)에 인빈에 책봉됐다. 선조가 승하 한 후 사저에 나가 살았으며, 1613년(광해 5년)에 59세로 세상을 떠났다.1623년 인조반정으로 손자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의 조모(祖母)가 됐으며, 1632년(인조 10년)에 셋째 아들 정원군이 원종대왕으로 추존되면서 왕의 사친(私親)이 됐다. 1636년(인조 14년)에 인빈으로 추존됐다. 이후 영조 대에 사친추존제도가 성립되면서 1755년(영조 31년)에 시호를 경혜(敬惠), 궁호를 저경궁(儲慶宮), 원호를 순강원(順康園)으로 추봉했다. <자료,사진출처=문화재청,조선왕릉관리소,공공누리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