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대 인조 · 인열왕후 장릉(長陵) 인조 계비 장렬왕후 휘릉(徽陵)
2017-08-06 김종혁 기자
능의 역사
1635년(인조 13년)에 인조의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636년에 파주 운천리에 능을 조성했다.이때 인조는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공사했다. 이후 1649년(인조 27년)에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쌍릉의 형태로 능을 조성하게 된다. 그러나 장릉에 화재가 자주 일어나고 뱀과 전갈이 능 주위에 무리를 이루며 석물 틈에 집을 짓는 변이 계속되자 1731년(영조 7년)에 현재의 자리로 천장했다.인조(仁祖) 이야기
남한산성 파천, 삼전도 수난
결국 1627년(인조 5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다시 1636년(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파천했으나 청나라에 항복해 삼전도에서 수난을 당했다.그 후 1649년(인조 27년)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효종이 왕위에 오른 후 묘호를 열조(烈祖)라 했으나, 최종적으로 묘호를 인조라 했다.인열왕후(仁烈王后) 이야기
인열왕후 한씨(1594~1635)는 본관이 청주인 서평부원군 한준겸과 회산부부인 황씨의 딸로 1594년(선조 27년)에 강원 원주 내우소에서 태어났다.1610년(광해군 2년)에 능양군과 가례를 올려 청성현부인에 봉해졌다.1623년에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됐다. 인조 사이에서 6남 1녀를 낳았다. 1635년(인조 13년)에 창경궁 여휘당 산실청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16대 인조 계비 장렬왕후 휘릉(徽陵)
휘릉은 조선 16대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단릉 형식으로 봉분에는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는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했다.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는 아담한 크기에 다리가 짧아 배가 바닥에 거의 닿을 정도이다.
이는 건원릉의 예를 잠깐 따른 것으로, 휘릉 이후의 왕릉에는 다시 고석을 4개씩 배치했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 등이 배치됐다. 휘릉 정자각은 다른 왕릉의 정자각과 달리 정전의 양 옆에 익랑을 추가하여 웅장함을 더했다.
장렬왕후(莊烈王后) 이야기
1649년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자의왕대비가 됐으며, 효종, 현종, 숙종 대에까지 살아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다. 그 후 1688년(숙종 14년)에 창경궁 내반원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나이에 인조의 두 번째 왕비로 간택된 장렬왕후는 인조가 세상을 떠난 후 자의왕대비라는 호칭으로 효종, 현종, 숙종 대에까지 왕실 최고의 어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상복입는 기간을 놓고 두 번의 당쟁 일어나
성리학에 근거한 상례에 따르면 장자(맏아들)의 상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고, 차자 이하의 상에는 기년복(1년)을 입도록 돼 있다. 1659년(효종 10년)에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왕대비가 상복을 얼마동안 입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게 된다.이 사건을 제 1차 예송논쟁(기해예송)이라고 하는데, 이 때 서인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아들이기 때문에 기년복을 주장했고, 남인은 효종이 인조의 장자는 아니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자의 대우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대립한 것이다.이 논쟁은 결국 장자와 차자의 구별 없이 기년복을 입게 한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르는 것으로 결말지어졌고, 이로 인해 기년복을 주장했던 서인이 승리해 정권을 잡게 됐다.그 후 15년 뒤인 1674년(현종 15년)에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이를 제 2차 예송논쟁(갑인예송)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서인은 인선왕후가 인조의 둘째며느리이기 때문에 대공복(9개월)을 주장했고, 남인은 왕비였기 때문에 첫째며느리의 대우로 하여 기년복(1년)을 주장했다.이 때 현종은 남인의 주장을 채택해 서인 정권을 몰락시키고 남인 정권이 세력을 잡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자료,사진출처=문화재청,조선왕릉관리소,공공누리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