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 17대 임금 효종(孝宗)과 인렬왕후 영릉(寧陵)
2017-08-08 김종혁 기자
효종의 북벌계획
효종은 오랫동안 청나라에 체류할때 서쪽으로는 몽고, 남쪽으로는 산해관, 금주위 송산보(錦州衛松山堡)까지 나아가 명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직접 경험했고, 동쪽으로는 철령위(鐵嶺衛)·개원위(開元衛) 등으로 끌려다니며 갖은 고생을 했다. 청나라에 원한을 품고 조정의 배청(排淸) 분위기와 함께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했다.즉위후 청나라와 연결된 김자점(金自點) 등 친청파(親淸派)를 파직시키고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대청(對淸) 강경파를 중용해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했다.그러나 김자점 일파와 역관배(譯官輩)인 정명수(鄭命壽)·이형장(李馨長) 등이 청나라와 은밀히 연결돼 있어 이들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졌다. 그 결과 즉위초에는 왜정(倭情)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남방지역에만 소극적인 군비를 펼 뿐 적극적인 군사계획을 펼 수 없었다.조선에 대해 강경책을 펴던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多爾袞)이 죽자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태도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이용해 1651년(효종 2년) 12월 이른바 조귀인(趙貴人:인조의 후궁)의 옥사를 계기로 김자점 등의 친청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고, 청나라에 있던 역관배들도 거세한뒤 이듬해부터 북벌을 위한 군비확충을 본격화했다.1652년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 강화하고, 금군(禁軍)을 기병화하는 동시에 1655년에는 모든 금군을 내삼청(內三廳)에 통합하고 군사를 늘려 왕권강화에 노력했다.또한,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하는 수어청을 강화해 서울 외곽의 방비를 강화 했다. 중앙군인 어영군을 2만, 훈련도감군을 1만으로 늘리고자 했으나 재정문제로 실패했다.이밖에, 1654년 3월에는 지방군의 핵심인 속오군(束伍軍)의 훈련을 강화하기 위해 인조 때 설치됐다가 유명무실화된 영장제도(營將机制)를 강화하는 동시에 1656년에는 남방지대 속오군에 보인(保人)을 지급해 훈련에 전념토록 했다.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hamel, h.) 등을 훈련도감에 수용해 조총·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 보수하고 이에 필요한 화약을 얻기 위하여 염초(焰硝)생산에 노력했다.이와같은 효종의 군비확충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국세가 이미 확고해져 북벌의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다. 다만, 군비확충의 성과는 두 차례에 걸친 나선정벌에서만 효과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