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을 만나다-제21대 임금 영조 · 정순왕후 원릉(元陵)

2017-08-15     김종혁 기자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원릉은 조선 21대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 쌍릉의 형태이며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망주석 기단부에 조각된 꽃무늬가 세련되고 화려하며 오른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위를 향하고 있고, 왼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아래로 내려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장명등은 사각옥개형의 장명등으로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 부분을 제외하고 상, 중, 하대석 부분은 꽃무늬로 장식돼 있다.

영조의 원릉을 시작으로 중계와 하계 사이의 단을 없애고 문석인과 무석인을 한 단에 같이 배치했다.
능침 아래의 비각에는 총 3기의 표석이 건립됐다. 1비는 1776년 영조 승하 후에 세운 영종대왕 표석, 2비는 영조 추존 후 세운 영조대왕 표석, 3비는 1805년(순조 5년)에 세운 정순왕후 표석이다.

<오른쪽 아래 사진 비각, 3기의 표석과 세개의 출입문을  달았다>

능의 역사

1776년(영조 52)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에 능을 조성했다.원래 이곳은 효종의 구 영릉(寧陵)자리였는데, 1673년(현종 14년)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고 해 천장하기로 하고 봉분을 열었으나 깨끗해, 전날의 영릉도감의 책임자까지 파직됐던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영조는 원래 1757년(영조 33년)에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을 조성하면서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어 쌍릉으로 조성하기를 원했지만 손자인 정조가 현재의 자리에 모셨다. 그 후 정순왕후 김씨가 1805년(순조 5년)에 세상을 떠나, 원릉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했다.

영조(英祖) 이야기

영조(1694~177)는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로 1694년(숙종 20년)에 창덕궁 보경당에서 태어났다. 1699년(숙종 25년)에 연잉군에 봉해지고, 경종이 즉위한 후에 왕세제에 책봉됐다.당시 왕세제 책봉을 주장하는 노론과 시기상조론을 들어 반대한 소론 간의 정쟁이 극심했으며, 영조 자신도 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경종을 시해하려는 시도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기도 했다.이런 치열한 경쟁과 우여곡절 끝에 1724년에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오르게 됐다. 영조는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및 해소하는 것을 왕정의 큰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즉위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고, 균형 있는 인재 등용을 통해 탕평세력을 구축했다.영조는 탕평 정치로 조정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여러 가지 폐단을 고치는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특히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줬던 군역을 감소한 균역법을 시행하고, 노비 신공을 혁파하는 등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

사도세자 뒤주에 가둬 죽여

또 청계천 건설과 여러 사치풍조를 금지하고 법제도를 개편해 '속오례의', '국조상례보편' 등을 저술했다. 그러나 붕당정치의 폐단으로 즉위 초에 경종 독살설에 휘말려 옥사가 일어났고 1762년(영조 38년)에는 세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과도한 경계심으로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둬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는 등 붕당정치의 혼란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했다. 조선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53년간 군주의 자리에 올랐던  영조는 1776년에 경희궁 집경당에서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나무꾼 '소령릉' 호칭에 감격 능참봉 제수

영조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하루는 영조가 미복 차림으로 궁을 나와 산책하던 중에 시골의 나무꾼이 향나무를 팔고 있는 것을 봤다.

영조가 향나무를 어디서 캐온 것이냐고 물으니 무식한 나무꾼은 제 앞의 임금을 몰라보고 나라님의 모후를 모신 소령릉이 있는 고령 양주산에서 캐온 나무라고 설명했다.

나무꾼은 능과 원을 구별하지 못해 능이라고 부른 것이지만 오랜 세월 어머니의 묘를 능으로 꾸며드리고 싶었던 영조는 나무꾼의 ‘소령릉’ 소리에 감격했다. 그리하여 나무꾼이 팔던 향나무를 비싼 값에 쳐주고 그를 소령원 참봉에 제수했다고 한다.

영조는 강하고 결단력 있는 군주였으나 내면으로는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와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 정쟁에 휘말려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연 등 큰 아픔을 평생 삭여야 했다.

정순왕후(貞純王后) 이야기

영조의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1745~1805)는 본관이 경주인 오흥부원군 김한구와 원풍부부인 원씨의 딸로 1745년(영조 21년)에 여주 사저에서 태어났다.1757년 영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인 1759년(영조 35년) 15세의 나이로 영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됐다.15세의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정순왕후의 대담하고 당찬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는 왕비 간택 때에서부터 전해진다.

간택시 물음에 '세상 인심이 가장 깊다'고 답한 정순왕후

간택 시 영조가 왕비 후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고 대답했지만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말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가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보릿고개라는 인상적인 답을 했다고 전한다.왕비로 간택된 후에는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하여 잠시 돌아서 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고 추상같이 꾸짖었다고 한다.어린 나이였음에도 왕비의 체통을 지킬 줄 아는 당찬 여인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됐으며 1800년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11세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했다.이때 스스로를 여주(女主, 女君)라 칭하고 실질적인 국왕의 권위를 갖고 모든 권한을 행사했다. 과감하게 국정을 주도해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서약을 받았으며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인물들의 힘을 약화시켰다.다음해에는 천주교 탄압을 일으켜 정약용 등의 남인들을 축출하고 국왕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하는 등 정조가 수립한 정치질서를 부정했다. 1804년에 수렴청정을 거뒀으며 1805년(순조 5년)에 창덕궁 경복전에서 61세로 세상을 떠났다.<자료,사진출처=문화재청,조선왕릉관리소,공공누리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