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대한제국 고종태황제 명성태황후 홍릉(洪陵)
2016-08-29 김종혁 기자
이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 한 후 명나라의 황제릉을 인용하고 기존의 조선왕릉을 계승해 개혁한 형식이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을 설치했다. 기존의 능침공간에 있던 석물(석양, 석호, 문무석인)들은 제향공간 앞으로 배치하고, 종류와 개수를 늘렸다.
능의 역사
1895년(고종 32)에 명성태황후 민씨는 일본에 의해 시해된 후(을미사변) 시신이 궁궐 밖에서 소각됐다.이후 일본의 압박으로 폐서인됐다가 다시 복위되고, 동구릉 내 숭릉 오른쪽 언덕에 숙릉(肅陵)이라는 능호로 산릉공사를 시작했다.그러나 당시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고종이 아관파천하자 산릉공사가 중단됐다가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명성황후로 추존해 홍릉(洪陵)이라는 능호로 현재의 동대문구 청량리에 새로 능을 조성하기 시작 했다.이 때 청량리 홍릉에는 기존의 정자각 대신 침전을 설치했다. 그러나 1900년에 홍릉의 불길론이 주장돼 현재의 남양주 금곡 홍릉에 새로운 산릉공사를 시작 했으나 당시 정치적인 상황에 의해 공사가 또다시 중단됐다.그 후 고종이 1919년에 세상을 떠나자 중단됐던 금곡의 홍릉자리를 다시 공사해, 명성태황후를 먼저 천장한 후 고종을 합장해 능을 조성했다.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 이야기
일본이 퇴위시킨 대한제국 초대황제
이를 빌미로 일본과 친일 대신의 강요로 1907년에 강제 퇴위됐다. 그 후 1919년에 덕수궁(경운궁) 함녕전에서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이 유포되어 3.1 운동이 일어나게 됐다.아관파천(俄館播遷)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이야기
명성태황후 민씨(1851~1895)는 본관이 여흥인 여성부원군 민치록과 한창부부인 이씨의 딸로 1851년(철종 2년)에 여주 사저에서 태어났다.1866년(고종 3년)에 고종의 사친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로 책봉됐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자 친정일가가 실권을 장악했다.쇄국정책에 맞서 일본과 수교하고, 1882년에는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로워지자 궁궐을 탈출하여 경기도 장호원에서 피신생활을 했다.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해 군란을 진압하고 다시금 정권을 잡았다.1884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 때에도 청나라를 개입시켜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1894년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했다.이러한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본공사에 의해 1895년(고종 32)에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에서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이후 쇄국정책을 펼쳤던 흥선대원군에 맞서 명성황후는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다.1894년 흥선대원군이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갑오개혁을 주도하자, 러시아에 접근해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했다.그러나 일본 정부는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사주해 명성황후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미우라는 1895년 10월 2일 한성신보사에 있는 낭인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를 공사관으로 불러 거액의 거사자금을 주고 왕비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다.그 외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을 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 정부에서는 일본 훈련대의 해산과 무장해제를 통고하고,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한 일본은 명성황후의 시해 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정했다.일본인 자객들은 명성황후의 처소인 옥호루로 들이닥쳐 궁녀들 사이에서 명성황후를 찾아내 처참하게 살해했다. 낭인들은 시신을 궁궐 밖으로 끌어내 불에 태웠으며, 그 후 일본은 고종에게 명성황후를 폐서인 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게 불운한 최후를 맞은 명성황후는 곧바로 복위됐고 대한제국 선포 후 명성황후로 추존됐다.<사진=매일일보 김천규 기자. 자료출처=문화재청,조선왕릉관리소,공공누리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