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그대 바쁜가? 그럼 세월은

2017-10-24     김종혁 기자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취재현장은 늘 길 위에서 만나지고 기사 역시 그러하다 믿어 가끔 하릴없이 화랑가 주변을 거닐거나 전시,공연장 언저리를 맴돈다. 때로는 고궁이나 유적지에서 소일하는데  그때마다 서툰솜씨로 사진을 찍거나 메모를 남긴 뒤 훗날 다시 들춰보곤 한다.대부분 취재당시의 감흥과 관심은 사라지고  수첩기록으로 남아 관심밖으로 멀어진다.보름 전쯤 인사동 거리를 기웃거리다가 한 화랑으로 들어섰다. 다음은 그때의 기록과 취재메모중 발췌한 작가와의 대화 일부, 그리고 작품 몇 점. 계절 바뀌면 잊혀질까 염려되므로 서둘러 흔적을 남긴다.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박은신 작가는 지난 10월 초 인사동에서 한국화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작가가 전공한 유화나 아크릴이 아닌, 순지위에 먹과 분채, 석채, 금분, 금박을 이용한 한국화 작품을 선보였던  전시는 작품 30여점이 출품됐는데 불교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작가가 동양의 철학과 현대과학이 만나는 접점, 불교철학과 현실이 만나는 접점 등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라고 화평을 썼던 작가의 지인이 도록에서 밝히고 있다. 다소 철학적일 수 있는 무거운 주제를 작가는 시적인 언어로 풀어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다면서,  때문에 화면은 개념적이거나 철학적이기 보다는 시처럼 부드럽고 서정적인 느낌을 준다.다고 첨언하고 있다. 작가의 화면에는 부처의 수인, 흩날리는 매화꽃잎, 버들잎, 떨어진 동백꽃, 백로 등이 자주 등장한다.  이 도상들은 초월적인 이상의 것과 지극히 현실적인 것을 상징하는 두 가지의 우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다음은 '작가 노트'에서 밝히는 박은신작가의 작업메모.[“나의 작업은 지극히 초월적인 것과 지극히 현실적인 것과의 조우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작업에는 두 가지의 시선이 교차되어 있다하나는 무한을 향한 시선이다.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도약에도 변하지 않는, 부동의, 일종의 영원성을 향한 시선이다.이 무한이란 것, 초월이라는 것은 모두에게 다른 방식으로 꿈꿔질 것이겠지만 나에게는 때로는 우주로, 붓다로, 적벽으로, 또는 고목으로 상징된다.동시에 다른 하나는 현실을 인식하는 시선이다. 떨어지거나 흩날리는 꽃잎,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 동백꽃은 현실적 시간의 흐름이자 찰나이고, 약함이고, 때로는 인간의 슬픔과 절망이다지나가버리는 많은 것을 안타까워하는 인간의 한숨이다. 그리고 때로는 생명의 단짝인 죽음까지 포함한다.그리고 그 속에 내가 있다.방관자가 아니라 그 속에서 깨어있고 싶은.잠들지 않고 명료하게 바라보고 싶은.이러한 이미지들이 보여주는 방식은 개념적이거나 사변적이기보다는 시詩적인 운율과 여운을 통한 우화적 드러남이다나는 음유시인과 같이 그림그리고 싶다무한한 시공간 을 느끼는 무한소의 내가소요하며 그렇게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읊조리듯 그려보는 것이다 .“]또 다른 작업노트는 이렇게 속내를  밝힌다.[-수인에 대하여-모든 몸짓, 생각짓은 연기처럼 그에게 배인다. 행.주.좌.와. 어.묵.동.정. 그에게 배인다. 영원의 시간동안 그에게 배인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된다] 여기서 작가가 말하는 그는 수행을 통해 완성에 이른 존재를 말함이 아니라고 믿어 말을 섞었다.Q : 수행을 통해 완성에 이른 존재는 시간을 초월 할까요.? 아니면 우주 그 자체로 편재하는 것 일까요.?A : 떨어지는 꽃잎은 찰나에 머무는 생명이지요. 이미 머무름에 존재했다면 굳이 우주를 들먹일 필요가 있을까요..? 사념의 한 조각이 찰나에 머물러 진다면 그때는 있고 없음을 넘어선 상태 아닐까요.? 먼지와 가늠으로 짐작할 우주의 크기를 사량분별로 비교한들 의미가 있겠나 싶습니다.생각이나 뜻을 글로 풀어내는 글쟁이는 이미 차고 넘치는 세상. 가끔 단어의 의미조차 해석하기 힘든 우주나 찰나, 또는 무한소(無限小)를 화폭에 담아내는 작가들을 만나면 끝간데 없이 아득해진다. 작가노트가 이어진다.[눈물 많은 우리이다.  조각난 시간이다. 시간의 조각이 흐름임을 알 때 눈물은 강이 되고 마침내 허공의 바다로 모인다. 그 눈물의 우주에서 굽어진 시공간 속에서 나는. 잠들지 않는다. 소요한다.]
적벽부-적벽부에는 붓다의 시선이 있다. 오리온자리의 베텔기우스 항성이 곧 초신성 폭발을 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곧’은 몇 년, 몇백 년, 혹은 몇천 년 이상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미'일 수도 있다. 시간의 강이란 그런 것이다. 무한에 가까운 시공간에서 무한소의 존재로 살아가지만 우리는 모두 우주의 나이를 가진 존재이다 .무한으로 확장되는 무한소,그 흐름을 본다는 것이, 느낀다는 것이 현실의 시름을 잊게 하는 달콤한 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위안을 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나를 위안하는 모든 것을 버린다.그저 우주의 나이를 가진 존재의 당당함, 그 유연하고도 강인한 영원성을 잊지 않으려는 것이다]작가는 적벽부에서 시공을 초월한 의미를 발견하고자 작업을 했다고 전했다. 사족하나를 달아본다.'티끌 하나에도 온 우주가 담겨있다'는 불경 한 귀절과 '시작도 끝도 없는 그자리에서 뭔가를 봤다 해도 틀린다'던 어느 산골 오두막 노승의 일갈이 중첩되어 가을 초입 시린 목덜미를 감싸고 돈다.  그대 바쁜가? 그렇다면 세월은... < 작가의 초상은 생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