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2호선 성추행 천국
매년마다 증가세… 법적 처벌은 ‘미약’
마감이 다가오면 야근과 밤샘 작업이 많아지는 잡지사. 임 양은 그날따라 마감에 지친 터라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지친 그녀의 몸이 긴장으로 경직되는 일이 일어났다.
자신의 등 뒤에서 누군가 하체를 바짝 밀착시킨 채 비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임 양은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차안은 사람과 사람이 밀착할 정도로 붐비지 않았다.
순간 ‘치한이다’라는 생각에 소름이 오싹 돋은 임 양. 그녀는 치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임 양이 자리를 옮기고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그 남자는 본디 자신의 자리가 그곳이었던 것처럼 또다시 그녀의 뒤로 슬며시 자리를 옮겼다. 심지어 남자는 ‘밀착’ 정도에 그치지 않고 임 양의 귀와 목에 입김과 콧김을 내뿜고 있었다.
임 양은 더럽고 추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치한을 향해 “뭐하는 거냐, 저쪽으로 좀 떨어져 달라”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해코지 당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2호선 신당역이 목적지였던 그녀는 결국 치한을 피해 6정거장이나 앞선 시청역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임 양은 기자에게 “주위에 내가 당한 일을 털어놓자 하나같이 똑같은 경우를 당한 사례가 많다고 고백했다”며 “그때의 기분을 생각하면 다시는 지하철을 타고 싶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성추행의 악몽
2호선 강변역 근처 소재의 모 중소기업에 근무하고 있는 김 모(25)양 역시 지난달 26일 성추행을 당했다.
매일 봉천역에서 강변역까지 지하철로 출퇴근 하는 김 양. 사건 당일도 그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출근을 위해 지하철에 올랐다.
출근 시간대라 많은 사람들이 몸을 밀착하고 있었다. 전동차가 교대역에 이르렀을 쯤 그녀는 낯선 남자의 손길에 굳어 버렸다. 누군가 김 양의 하반신을 더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자신이 성추행 당한 사실을 남들에게 알리는 것이 창피했기 때문이었다.
김 양은 “지하철에 사람이 많이 있었다. 그 상황에서 ‘치한이야’하고 소리치는 것이 굉장히 수치스럽게 느껴졌다”며 “또한 출근길 지하철이라 사람도 많아 다른 곳으로 옮겨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김 양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자 치한은 과감해졌다. 그녀의 허리를 손으로 감싸 안고 자신의 하반신을 김 양의 하반신에 갖다 댔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김 양은 잠실에서 치한이 내리고 나서야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그녀는 출퇴근 시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고 버스를 이용한다.
김 양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눈물이 날만큼 수치스러웠다”며 “현재 출퇴근은 물론이고 그 어디를 이동할 때도 지하철은 일절 이용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서울의 모 대학교에 재학 중인 박 모(22)양은 지하철에서 만난 성추행범과 실랑이를 벌이다 경찰서까지 간 적도 있었다.
박 양은 “지난 6월, 친구들을 만나러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건대입구역으로 향하던 중 갑자기 낯선 남자가 뒤에서 확 끌어안았다”며 “당시 사람이 많아 혼란한 틈을 타 나를 성추행해지하철 수사대에 신고했다”고 말했다.
국민중심당 정진석 의원이 최근 언론사에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올 초부터 지난 7월 30일까지 수도권 지하철 내에서 일어났던 성폭력 사건은 319건으로 하루에 한번 이상 성추행이 지하철에서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나마나한 처벌, 늘어나는 성추행
그럼 이같이 지하철 내 성범죄가 늘어나는 이유는 무얼까. 여성시민단체는 ‘법적 처벌의 미약함’을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한다.
‘서울 여성의 전화’의 송란희 부장은 “지하철 내 성추행범의 경우 많이 대부분 조사만 받고 풀려나는 사례가 많다”며 “피해자가 강하게 처벌을 요구해야만 비로소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송 부장은 이어 “이처럼 대부분 불구속으로 풀려나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성추행을 하는 남성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지하철 내 성추행을 막기 위해서는 법적 처벌을 보다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단체의 이러한 주장은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경찰도 인정하고 있다. 종로 3가 지하철수사대의 한 관계자는 “성추행 가해자의 경우 대부분 불구속으로 주의만 받고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피해자를 보호하고 범인을 검거해야 하는 우리의 입장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지하철 내 성범죄를 막기 위해선 성추행이 빈번한 시간대에 CCTV를 운영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일부 피해자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임 양은 “지하철 내 성범죄가 만연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며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성추행이 빈번히 일어나는 출·퇴근 시간만이라도 CCTV를 가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직에서 교수까지 다양하게 분포
이처럼 여성단체를 비롯한 피해 여성들은 지하철 내 성범죄의 원인과 해결방안을 위해 다방면으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럼 당장 마주친 성추행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일선 경찰들은 큰 소리로 자신의 입장을 가해자에게 전달하라고 지적한다.
종로 3가 지하철 수사대의 한 관계자는 “여성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거나 따라다니는 것이 성추행 가해자의 특징”이라고 설명하며 “이러한 사람을 발견한다면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신속히 자리를 이동할 것”을 권했다.
이 관계자는 또 “현재 종로 3가에서만 8개 팀이 운영 중에 있고 각 팀별로 한 주당 1~2건 정도의 성범죄를 경험한다”며 “가해자의 경우도 20대에서 50대, 직업도 무직에서 교수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만약 어쩔 수 없이 성추행 피해를 당할 위기에 닥치면 가만히 있지 말고 큰 소리로 무안을 주거나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며 “지금까지 수사하면서 강하게 나오는 상대에게 크게 반발하는 간 큰 가해자는 본적이 없다”고 성추행에서 벗어나는 법을 설명했다.
현재 서울지방경찰청은 지하철 내 성범죄를 막기 위해 지하철 수사대를 구성하고 있다. 종로 3가역과 이수역 2개소에 형사반을 편성하고 신도림역, 청량리역 등 14개소에 출장소를 배치해 지하철 내 성범죄 문제를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