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2호선 성추행 천국

매년마다 증가세… 법적 처벌은 ‘미약’

2006-09-29     이재필

[매일일보닷컴=이재필 기자]서울 마포구 소재 모 잡지사에 다니고 있는 임 모(26)양. 그녀는 지난 달 22일 지하철 2호선에서 느꼈던 일을 생각하면 잠을 설친다. 지하철 치한에게 성추행을 당했기 때문이다.

마감이 다가오면 야근과 밤샘 작업이 많아지는 잡지사. 임 양은 그날따라 마감에 지친 터라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지친 그녀의 몸이 긴장으로 경직되는 일이 일어났다.

자신의 등 뒤에서 누군가 하체를 바짝 밀착시킨 채 비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임 양은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차안은 사람과 사람이 밀착할 정도로 붐비지 않았다.

순간 ‘치한이다’라는 생각에 소름이 오싹 돋은 임 양. 그녀는 치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임 양이 자리를 옮기고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그 남자는 본디 자신의 자리가 그곳이었던 것처럼 또다시 그녀의 뒤로 슬며시 자리를 옮겼다. 심지어 남자는 ‘밀착’ 정도에 그치지 않고 임 양의 귀와 목에 입김과 콧김을 내뿜고 있었다.

임 양은 더럽고 추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치한을 향해 “뭐하는 거냐, 저쪽으로 좀 떨어져 달라”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해코지 당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2호선 신당역이 목적지였던 그녀는 결국 치한을 피해 6정거장이나 앞선 시청역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임 양은 기자에게 “주위에 내가 당한 일을 털어놓자 하나같이 똑같은 경우를 당한 사례가 많다고 고백했다”며 “그때의 기분을 생각하면 다시는 지하철을 타고 싶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임 양이 겪은 이 같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은 지하철 전체에서 무수히 일어나는 성폭력 사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성추행의 악몽

2호선 강변역 근처 소재의 모 중소기업에 근무하고 있는 김 모(25)양 역시 지난달 26일 성추행을 당했다. 
매일 봉천역에서 강변역까지 지하철로 출퇴근 하는 김 양. 사건 당일도 그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출근을 위해 지하철에 올랐다.

출근 시간대라 많은 사람들이 몸을 밀착하고 있었다. 전동차가 교대역에 이르렀을 쯤 그녀는 낯선 남자의 손길에 굳어 버렸다. 누군가 김 양의 하반신을 더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자신이 성추행 당한 사실을 남들에게 알리는 것이 창피했기 때문이었다.

김 양은 “지하철에 사람이 많이 있었다. 그 상황에서 ‘치한이야’하고 소리치는 것이 굉장히 수치스럽게 느껴졌다”며 “또한 출근길 지하철이라 사람도 많아 다른 곳으로 옮겨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김 양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자 치한은 과감해졌다. 그녀의 허리를 손으로 감싸 안고 자신의 하반신을 김 양의 하반신에 갖다 댔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김 양은 잠실에서 치한이 내리고 나서야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그녀는 출퇴근 시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고 버스를 이용한다.

김 양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눈물이 날만큼 수치스러웠다”며 “현재 출퇴근은 물론이고 그 어디를 이동할 때도 지하철은 일절 이용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서울의 모 대학교에 재학 중인 박 모(22)양은 지하철에서 만난 성추행범과 실랑이를 벌이다 경찰서까지 간 적도 있었다.

박 양은 “지난 6월, 친구들을 만나러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건대입구역으로 향하던 중 갑자기 낯선 남자가 뒤에서 확 끌어안았다”며 “당시 사람이 많아 혼란한 틈을 타 나를 성추행해지하철 수사대에 신고했다”고 말했다.

국민중심당 정진석 의원이 최근 언론사에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올 초부터 지난 7월 30일까지 수도권 지하철 내에서 일어났던 성폭력 사건은 319건으로 하루에 한번 이상 성추행이 지하철에서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2호선의 경우는 2004년 226건, 2005년 246건으로 지하철 전 노선 가운데 가장 많은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나마나한 처벌, 늘어나는 성추행

그럼 이같이 지하철 내 성범죄가 늘어나는 이유는 무얼까. 여성시민단체는 ‘법적 처벌의 미약함’을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한다.

‘서울 여성의 전화’의 송란희 부장은 “지하철 내 성추행범의 경우 많이 대부분 조사만 받고 풀려나는 사례가 많다”며 “피해자가 강하게 처벌을 요구해야만 비로소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송 부장은 이어 “이처럼 대부분 불구속으로 풀려나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성추행을 하는 남성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지하철 내 성추행을 막기 위해서는 법적 처벌을 보다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단체의 이러한 주장은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경찰도 인정하고 있다. 종로 3가 지하철수사대의 한 관계자는 “성추행 가해자의 경우 대부분 불구속으로 주의만 받고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피해자를 보호하고 범인을 검거해야 하는 우리의 입장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지하철 내 성범죄를 막기 위해선 성추행이 빈번한 시간대에 CCTV를 운영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일부 피해자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임 양은 “지하철 내 성범죄가 만연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며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성추행이 빈번히 일어나는 출·퇴근 시간만이라도 CCTV를 가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빛나는 여성’의 최연희 간사 역시 “현재 각 지하철역마다 CCTV가 작동중이지만 지하철 내부에서는 가동하고 있지 않다”며 “여성들의 피해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만큼 CCTV를 운영하는 것은 성범죄 예방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직에서 교수까지 다양하게 분포

이처럼 여성단체를 비롯한 피해 여성들은 지하철 내 성범죄의 원인과 해결방안을 위해 다방면으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럼 당장 마주친 성추행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일선 경찰들은 큰 소리로 자신의 입장을 가해자에게 전달하라고 지적한다. 

종로 3가 지하철 수사대의 한 관계자는 “여성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거나 따라다니는 것이 성추행 가해자의 특징”이라고 설명하며 “이러한 사람을 발견한다면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신속히 자리를 이동할 것”을 권했다. 

이 관계자는 또 “현재 종로 3가에서만 8개 팀이 운영 중에 있고 각 팀별로 한 주당 1~2건 정도의 성범죄를 경험한다”며 “가해자의 경우도 20대에서 50대, 직업도 무직에서 교수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만약 어쩔 수 없이 성추행 피해를 당할 위기에 닥치면 가만히 있지 말고 큰 소리로 무안을 주거나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며 “지금까지 수사하면서 강하게 나오는 상대에게 크게 반발하는 간 큰 가해자는 본적이 없다”고 성추행에서 벗어나는 법을 설명했다.

현재 서울지방경찰청은 지하철 내 성범죄를 막기 위해 지하철 수사대를 구성하고 있다. 종로 3가역과 이수역 2개소에 형사반을 편성하고 신도림역, 청량리역 등 14개소에 출장소를 배치해 지하철 내 성범죄 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이 관계자는 “지하철에서 성추행 당할 시 가까운 지하철 수사대에 신고하는 것도 사건을 해결하는 빠른 방법 중 하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