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 12월의 독립운동가 ‘최수봉’선생 선정 및 전시회 개최

2017-11-30     김종혁 기자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최수봉 선생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고 30일 밝혔다.
최수봉 선생은 1894년 3월 3일 밀양군 상남면에서 태어나 개량서당을 다니면서 한문과 신지식을 수학했고, 1910년 사립 동화학교(同和學校)에 편입학했다.

동화학교를 다니던 2년 동안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강렬한 조국애와 항일의식을 키워나갔다.

1913년 평양으로 가서 숭실학교에 입학해 숭실학교 4년 과정 중 3년만 다니고 중퇴했다.

이후 평양과 정주에서 광부와 우편배달부 생활을 하면서 독립운동 소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1918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펑티엔(奉天, 선양)과 안뚱(安東, 단둥) 사이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할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1919년 다년간의 외지생활을 접고 귀향. 1920년 의열단원 김상윤(金相潤)과 이종암(李鐘岩)을 만나 밀양경찰서 폭탄의거를 결의했다. 그 해 12월 26일 저녁 삼문리 농업용 창고에서 이종암을 만나 폭탄 2개를 건네받았다.

최수봉 선생은 12월 27일 아침 밀양경찰서에 접근해 폭탄을 투척했다. 첫 번째 폭탄은 불발이었다. 돌연한 사태에 놀란 순사들이 달려들었고, 그들을 향해 다시 폭탄을 투척했다. 폭탄은 큰 폭음을 내며 터졌지만, 순사부장 1명에게 타박상을 입히는데 그치고 말았다. 폭발 이후 황석이(黃石伊)의 집으로 도망쳐 자결을 시도했다.그러나 뒤쪽아 온 순사들에게 피체되어 재판에 회부됐다. 최수봉 선생은 재판을 받는 동안 조선의 독립을 위한 노력은 조선 국민으로서 당연한 의무라고 당당히 주장했다.재판 결과 사형이 언도돼 1921년 7월 8일 대구감옥에서 순국했다.정부는 고인의 활동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최수봉 선생 공적 내용
1910년 동화학교 입학
1913년 숭실학교 입학
1920년 밀양경찰서 폭탄의거
1921년 대구감옥에서 순국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최수봉 선생 폭탄의거 보도기사 <매일신보 1920년 12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