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을 빼닮은 큰 어른, 홍남순 변호사

쿠테타 저항 법관 사직, 5.18 ‘죽음의 행진’ 최선봉…민주화, 인권운동의 ‘대부’

2006-10-23     최봉석 기자

[매일일보닷컴=최봉석 기자]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인물은 많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들의 상당수는 우리사회로부터 소외받는 이른바 ‘마이너리티’들이었다. ‘힘있고 능력있는’ 기득권층들의 대부분은 민주화운동과 인권활동을 외면하거나 오히려 비판했다. 할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故 홍남순 변호사는 그런 면에서 볼 때 ‘원칙과 양심을 가지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노력해온’ 기득권층이었다. 그는 군사정권의 회유와 압력에 대해 “어둠의 시대에는 법보다 양심이 앞선다”고 말하며 소신을 유지했다. 유신 한파가 휘몰아친 70년대, 그의 별명은 ‘긴급조치 전문변호사’였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는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시민들의 행진 대오 최선봉에 직접 나섰다. 
정치권은 그에 대해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위해 평생을 바친 큰 어른”이라고 입을 모은다. 진보언론도, 보수언론도 이구동성으로 그를 민주화 인권운동의 ‘대부’라고 칭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물론 그의 지난 행적이 ‘재야 민주화운동’의 ‘대부’로서 모두를 만족하게 했던 것은 아니다. 90년대 들어 그는 “광주도 서운한 감정을 풀고 국민 화합에 동참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여, 당시 선(先) 5.18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등을 주장하는 재야 세력과 거리가 멀어지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각별한 사이였지만, 98년 한나라당 김홍신 의원이 김 대통령을 “염라대왕이 공업용 미싱으로 입을 꽤매야 할 정도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가 수사를 받으며 한동안 고생하자, 홍남순 변호사는 직접 김홍신 의원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민주주의는 말하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접근한 것이다.하지만 그는 거침없이 ‘옳은 소리’를 세상에 던진 인물이었다. 인생의 대부분을 정의의 편에 섰고, 불의와는 싸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고난과 가시밭길 속에서도 흔들림없이 소신을 지켰고, 궁핍한 삶도 마다하지 않고 민주투사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래서 그의 타계소식은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을 ‘슬픔’에 빠지게 하고 있다.

‘옳은 소리’를 세상에 던진 인물

지난 17일 광주 북구 망월동 국립 5.18민주묘지 내 5묘역 76호 묘소. 민주화의 큰별 ‘취영(翠英) 홍남순 변호사’가 세상과 작별을 고하고 영원히 이곳에 잠들었다. 향년 94세다. 그가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한 지 5년 만에 세상을 떠난 지난 14일 이후, 이명박 전 서울시장,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정동영 열린우리당 전 의장, 고건 전 국무총리,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등 유력한 대권 주자들을 비롯해 이인제 국민중심당 의원,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등 여.야 정치인들의 ‘광주 방문행렬’이 꼬리를 물고 있고 한결같이 고인의 넋을 기리고 있다.고인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박석무(전 5.18기념재단 이사장) 단국대 이사장은 “민주의 성지 광주의 어른이자 이 나라의 원로이신 큰 어른을 언제 다시 뵐지 슬프고 가슴이 막힌다”면서 “이제 어른이 원하던 민주화가 정착된 만큼 편안히 영면하시길 빈다”고 말했다. 문상객들은 한결같이 “광주의 큰 어른이 가셨다”며 애도의 뜻을 표현하고 있다.광주에서 고인의 존재는 ‘실천하는 양심’ 그 자체였다. 평생을 판사와 변호사로 살며 기득권층인 ‘주류’의 입장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으나 이와 정반대의 길을 택하며 우리 사회의 힘없는 약자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고 고인의 주변사람들은 회상하고 있다. 故 홍남순 변호사의 사상을 기리고 양심인과 정치범사건의 변론일지를 기록한 평전 ‘영원한 재야 대인 홍남순(나남출판. 2004년)’에 의하면, 그는 ‘무등산을 빼닮은 큰 어른’으로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가장 먼저 거리로 뛰쳐나왔으며, 가장 먼저 감옥에 들어갔지만 자신의 공을 인정하는 데는 끝까지 겸손했다.광주민주화유공자 보상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그의 ‘선비적’ 정신은 한결같았다. 고인은 자신이 말한 대로 ‘시민의 도리를 다했을 뿐이지, 보상을 받으려고 한 행동이 아니다’라고 거절했다. 한 예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후 4300여 명의 부상자 구속자 등이 2200억여 원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그는 아예 보상신청서를 내지 않았는데, 이와 관련 가족들은 “보상 이야기만 나오면 ‘죽은 이들에게 부끄럽다. 소신껏 참여한 일에 무슨 보상이냐’며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고 그의 옹고집을 전하고 있다.또 1998년 광주시 직원들이 찾아와 “이제는 보상금을 신청하시라”고 권유했으나 고인은 오히려 “없는 사람들을 도와줘라”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고인의 인권운동 역정은 박정희 정권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1912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故 홍남순 변호사는 능주보통초등학교와 일본 아카마야 상공학교를 늦깍이로 졸업했고 광복 직후인 1948년 제2회 조선 변호사 시험을 통해 법관이 됐다. 한국전쟁에서는 법무관으로 참전했고 이후 1953년 광주지법 판사, 1957년 광주고법 판사, 1960년 대전지법 판사를 지냈다.그러나 故 홍남순 변호사는 ‘법조문’이 아니라 ‘몸’으로 변론하는 길을 선택, 판사로서의 장밋빛 인생을 포기하고 고난과 인고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박정희 정권의 5.16 쿠테타에 저항해 1963년 법관을 사직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광주에 호남합동법률사무소를 차린 뒤 지인들과 함께 반독재 투쟁에 나섰고 주로 시국사건의 변론을 맡았다.

‘법조문’이 아닌 ‘몸으로’ 변론

이와 관련해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는 변호사로 ‘단 한번’ 승리했다고 한다. 전남대 학생들이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을 비난하며 유인물을 뿌린 이른바 ‘함성지 사건’이었는데 학생들을 변호한 고인은 여기서 무죄판결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변호사로 그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승리였다. 고인은 그 이후 시국사건 변론에서 단 한건도 무죄판결을 받아내지 못했다.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에서 발간된 ‘시대의 불꽃, 윤상원’을 썼던 소설가 윤동수씨는 이에 대해 고인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회상한다.“1970년대 공안부 검사들은 기소만 해놓으면 끝난다는 식이었다. 검사가 유죄를 입증하기보다는 변호인이 무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그대로 유죄판결이 떨어지고 마는 엉터리 재판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피고인의 양형에 매달리기보다 오히려 정부의 법률 운용에 대한 불법성을 지적하려고 애썼다.” 전 청와대 민정수석 김정남씨는 또 이렇게 회상한다. “법정에서의 변론 못지않게 감옥에서 신음하는 양심수를 찾아 위로하는 ‘법정 밖의 애정’이 더욱 절절했고, 구차한 법조문으로 따지기보다는 정의와 양심으로 그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 변론을 대신하였다. 말로 변론한 것이 아니라 관심과 사랑으로 변론하였으며, 피고인과 변호인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의 동지로 만났다.”고인은 1965년 한일협정 반대 발언으로 문제가 된 전 국회의원 유옥우 사건을 시작으로 학생, 문인, 정치인 등 양심수를 위해 60여 건 이상의 무료 변론을 맡았고, 78년 송기숙 전남대 교수의 교육지표사건 등 30여 건의 긴급조치 위반사건 변호를 맡아 ‘긴급조치 전문변호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인권운동을 시작했지만, 그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격량과 맞부닥치면서 본격적인 고난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80년 5월 민주화운동이 터진 뒤 당시 69세의 나이에 신군부에 체포돼 내란수괴 혐으로 징역을 선고받으면서 그의 인생이 변호인석에서 피고인석으로 추락해버린 것이다.당시 보안대 수사관들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 故 홍남순 변호사를 엮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모진 고문을 가했고 이 후유증으로 그의 머리카락은 백발로 변해버렸다. 홍 변호사는 팬티만 입고 고문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시멘트 바닥인 지하실에서 모포 한 장 없이 떨면서 잠을 청하면서도 신군부가 고인에게 들씌운 죄목인 ‘무기회수 방해죄’ ‘학생교사죄’ ‘정부전복기도’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 고인의 셋째 아들인 홍기섭(52)씨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5·18로 잡혀간 사람들 대부분은 고문을 받고 강압에 굴복해서 수사관들이 작성한 조서에 그대로 지장을 찍었지만, 아버지는 버텼다. 모진 협박과 고문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지장을 안 찍었다. 수사관들은 홍남순을 5·18의 수괴로 몰려고 했건만 끝내 실패했다. 이 사람, 저 사람과 맞추려고 몇 달을 시간을 끌었어도 홍남순을 수괴로 만들지 못했다.”

석방 뒤 민주화운동 주인공으로 앞장서

결국 그는 1980년 10월 육군 보통군법회의에서 내란중요임무종사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15년으로 감형을 받았는데, 81년 12월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이후 고인은 5·18민중항쟁의 진상을 규명하고 시민들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온 힘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2년 뒤인 83년 복권이 되자마자 민주화운동의 물꼬를 트는 데 주인공으로 나섰다. 군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80년대에도 강압에 굴하지 않고 5?18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애를 쓴 것이다. 85년 8월 그는 복권돼 변호사 자격을 회복했으며 인권운동의 공로로 86년 대한변호사회 인권상, 문민정부 시절인 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광주의 ‘큰 어른’인 홍남순 변호사가 망월동에 안장된 이후 각계 인사들의 발걸음은 뜸해지고 있지만, 평범한 시민들의 추모행렬은 끊이지 않고 있다. 언론의 표현대로 광주는 슬픔에 잠겨있으며 시민들은 민주화가 정착된만큼 고인이 편히 잠들길 기도하고 있다.광주시민들은 그의 타계 소식이 전해진 뒤 한가지 소망이 생겼다. 고인의 사무실이자 집인 광주 동구 궁동 15번지는 법조계에서는 ‘민주주의의 대법정’으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시민들은 궁동 15번지가 전남도청이나 남동성당처럼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보존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의 이 같은 바람과 달리, 군부독재와 불의에 맞서 자신의 살과 뼈를 다 내준 故  홍남순 변호사는 이를 원치 않을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그 이유는 이렇다. 광주 문제가 해결되고 문민정부 시대가 열리자 주위 사람들은 고인에게 통일운동이나 환경운동에 나서길 바랐다고 한다. 그러나 고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주위 사람들은 전하고 있다.“나는 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 광주시민으로서, 변호사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원래의 삶터로 돌아가라. 민주화운동이 직업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화운동은 국민의 도리다. 인권을 탄압하고 유린하는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는 것은 국민의 도리다. 나는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싸웠을 따름이다.”

홍남순 그는 누구인가?

1912년 전남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출생
1930년 화순군 능주공립보통학교 졸업
1941년 1월 26일 윤이정과 결혼
1948년 조선변호사 시험 합격
1953년 광주시 궁동 15번지에 변호사 개업
1957년 광주지방법원 판사로 부임
1958년 제 4, 5대 국회의원선거관리원회 광주을구 위원장
1964년 대일 굴욕외교반대 투쟁위원회 전남부위원장
1969년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전남위원장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전남 대표
1973년 ‘지식인 15인 시국선언’ 참여
1975년 민주회복국민회의 전남대표 상임위원
1980년 민주헌정동지회 전남 조직 책임자
광주 5·18항쟁 수습대책위원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 선고
1981년 징역 7년으로 감형, 홍성교도소로 이감
형 집행정지로 석방
1983년 광주시 궁동에서 변호사 다시 개업
고희논총기념 출판기념회
1984년 광주5·18구속자가족협의회 회장
1985년 5·18광주민중혁명기념사업 및 위령탑건립추진위원장
1986년 전남민주회복국민협의회 의장
2001년 뇌출혈로 쓰러짐
2006년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