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에서는 호랑이, 링밖에선 자상한 분”

소시민의 영웅 ‘박치기 왕’ 영원히 잠들다

2007-11-06     최봉석 기자

“지금은 프로축구와 프로야구 등이 국민적 인기를 끌고 있는 스포츠입니다. 하지만 지난 시절 우리는 ‘레슬링’이란 메가톤급 국민스포츠가 있었음에 행복했었습니다. 당시 한국 레슬링의 정점과 접점엔 항상 김일이라는 영웅이 있었지요. 옛날에는 누구 할 것 없이 가난했기에 저 또한 어렸을 때는 동네 방앗간 겸 만화방에서 흑백 TV를 통해 김일 선수의 경기를 시청했었습니다. 당시 연속극 ‘여로’가 국민 드라마였다면 김일이라는 ‘상품’은 국민 모두의 ‘스트레스 해소약’이었습니다. 상대 선수의 반칙으로 말미암아 이마가 찢어져 피를 철철 흘릴 때면 국민 모두가 대로(大怒)했고 안타까워했음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김일 선수는 멋진 박치기로 반드시 역전승을 일궈냈으며 그러한 모습에서 우리 국민들은 ‘할 수 있다’는 어떤 신앙심 같은 것을 배웠던 것입니다. 김일 선수는 박치기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진정 우리나라의 보배이셨습니다.”

한 네티즌이 ‘박치기왕 김일 선생을 추모하며’라는 제목으로 국정홍보처에 올린 글이다. 배고프고 암울하던 시절 ‘사각의 링’에서 ‘박치기 왕’으로 불리며 어른에게는 즐거움을, 어린이에게는 희망을 심어준 ‘국민적 영웅’인 김일(78)씨가 타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정치권도, 국민도 한 목소리로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다.

60~70년대를 풍미했던 대한민국 프로레슬링의 대표 스타, 김일씨가 지난 달 26일 만성신부전증과 심장혈관 이상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그리고 같은 달 29일 자신이 태어났던 전남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 평지마을 김일 기념관 옆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열린우리당 서영교 부대변인은 “60년 70년대 가난하고, 힘이 들 때 선생님은 우리 부모님께, 그리고 우리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우리들의 용사였다”면서 “일본과 민족문제로 분노를 느낄 때 선생님이 우리들의 분노와 한을 풀어 주셨는데 선생님께서 살아생전에 보여주신 모습은 우리들에게 큰 교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이왕표(50) 한국프로레슬링연맹 회장은 “선생님은 암울했던 60~70년대에 우리 부모님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셨던 분”이라며 “링에서는 호랑이셨지만 링 밖에선 한없이 자상하신 분이었다”고 말했다. 한 누리꾼은 “김일 선생님의 경기를 실제로 본적은 없지만, 영화를 통해서 혹은 언론과 책을 통해서 그 당시 선생님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었다”면서 “그는 고되고 지치는 좌절의 시대에 흑백 텔레비전 속에서 전국민의 가슴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셨던 영웅이었다”고 말했다.사람들은 전두환 정권이 프로야구를 통해 국민들의 관심을 외부로 돌렸다면,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에는 프로레슬링이 그 역할을 대신했던 스포츠로 인식하는데 이견이 없다. 그 중심에는 물론 김일 선수가 있었다. 

섬마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故 김일 선수는 1929년 전남 고흥 섬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큰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시절부터 180cm가 넘는 장신에 건장한 체격으로 각종 씨름대회를 휩쓸곤 했지만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며 평범한 청년기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 잡지를 읽게 되는데 그 일이 그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게 됐다. 당시 세계 챔피언으로 명성을 떨치던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기사였는데 여순반란 사건과 한국전쟁 때 좌익으로 몰려 고생했던 김일은 56년 여수에서 선원들을 통해 얻은 일본 잡지에서 역도산의 기사를 읽었고 그는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일본행을 결심하게 된다.27살이던 1956년 10월 일본 밀항에 성공했으나 불법체류자로 적발돼, 1년 간 일본 형무소 생활을 하게 된 김일은 형무소에서 역도산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냈고, 그의 열정에 탄복한 역도산의 보증으로 형무소를 나오게 됐다.김일은 곧바로 역도산 문하생 1기로 입문, ‘박치기 기술’을 연마하는 등 프로레슬링 선수가 되기 위한 갖가기 고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역도산은 함경도 출신이었는데, 일찍이 평양 박치기의 위력을 절감하고, 김일에게 “너는 조선 사람이니 박치기 기술을 익히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8년, ‘오오키 긴다로(大木金太郞)’라는 이름으로 프로레슬링계에 데뷔했다.1963년 9월 스승 역도산이 나이트클럽에서 폭력단원의 칼에 찔려 숨지던 날, ‘경기에서 지지 않는 것만이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 생각해왔던 그는 미국 LA에서 생애 최초로 세계레슬링협회(WWA) 제23대 챔피언 타이틀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스승인 역도산이 세상을 떠난 뒤 그는 다시 한국인 ‘김일’ 선수로 돌아온다. 2년 뒤인 1965년 한국으로 건너온 김일은 무려 3천여 회에 걸쳐 국내외 경기를 치르며 세계 타이틀을 20여 차례 따냈고, 72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인터내셔날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며 프로레슬링계를 평정했다.

72년 프로레슬링계 평정

그가 현역시절 국제무대에서 상대한 세계적인 스타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타이거 마스크, 도리 펑크, 니스라우스 즈비스코, 마이크 디비아시, 미스터 아토믹 등 당시 세계 레슬링계를 평정했던 강호들과 맞붙어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의 라이벌은 안토니오 이노키였다고 한다. 일본 프로레슬링의 영웅으로 손꼽히는 안토니오 이노키는 1960년 데뷔전을 치뤘는데 이때 상대가 김일이었다. 이노키는 김일과의 첫 대결에서 김일의 팔꺾기 기술에 걸려 7분 6초만에 패했다. 이후 두 사람은 수도 없이 링 위에서 맞붙었는데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총 38차례. 전적은 9승1패29무로 김일이 앞선다. 김일에 의해 추풍낙엽처럼 자빠졌던 또 다른 라이벌은 압둘라 부처였는데 그와의 경기도 사람들은 최고의 명승부로 기억하고 있다. 경기 때마다 매번 머리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으며 혈전을 치렀는데, 물론 이때도 사마귀처럼 머리를 뒤로 젖혔다 돌진하는 ‘박치기’를 통해 압둘라 부처를 제압했다고 한다.김일은 박정희 전대통령과 특별한 친분을 유지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일은 자신의 열렬한 팬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원으로 ‘김일 체육관’을 개관하기도 했는데, 당시 그가 최고의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저변에는 ‘박정희’의 지원이 깔려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국가재건을 위해 스포츠영웅을 필요로 했던 당시, 정권이 김일을 적임자로 선택했다는 얘기다. 어쨌든 1980년 5월, 제주도 경기를 마지막으로 치른 그는 1989년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일본에서 투병생활을 하다 1994년 1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귀국했다. 박치기 후유증으로 생긴 뇌혈관 질환과 당뇨, 고혈압에 거대결장으로 대장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는 등 기나긴 투병생활을 해왔다.

화려했던 현역때와 달리 말년은 쓸쓸

지난 1995년에는 일본에서, 2000년에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공식적인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화려했던 현역 때와 달리 초라하고 쓸쓸했다. 그의 라이벌이었던 안토니오 이노키가 나중에 국회의원에 당선되거나, 함경남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북한에서도 ‘국빈’ 대접을 받았던 것과 달리, 김일은 귀국 후 불우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물론 지난 3월에는 일본에 건너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출전한 한국 야구 대표팀을 격려하는 등 활동을 조금씩 벌여왔다. 또한 최근에는 프로레슬링 경기나 관련 행사가 있을 때마다 어김없이 힘든 몸을 이끌고 나타나 레슬링 중흥을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가 이처럼 스포츠를 사랑하고 노익장을 과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진 존재였다. 정부가 김일에게 지난 94년 국민훈장 석류장과 2000년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여하기도 했지만 그는 추억 속의 ‘영웅’이었을 뿐이었다.투병생활은 그의 말년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을지병원에서 아예 고정 병실을 내줬는데, 재혼한 부인 이인순(60)씨와 5평 남짓한 병실에서 타계 전까지 함께 지내왔다. 그리고 ‘박치기 왕’ 김일은 78세의 일기로 인생의 링에서 내려왔다.“그토록 무쇠같던 김일 선수가 와병 중이라는 소식에서도 다시금 벌떡 일어나리라 믿었건만 운명의 신은 그예 김일 선수를 전설의 사나이로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죽어도 세인들의 아쉬움이 가득하며 더불어 영원히 그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김일 선수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국정홍보처에 김일 선수에 대한 추모글을 올린 한 네티즌은 글의 말미를 이렇게 마무리지었다. 정부는 지난 달 26일 프로레슬러 故 김일 선수에게 ‘체육훈장 청룡장’을 추서했다.
bstaiji@sisaseoul.com

일본도 깊은 애도

“예? 정말 숨졌습니까?”
“저한테는 영웅이었는데…”

일본 열도도 故 김일 선수의 타계 소식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다. 김일 선수는 일본의 국민적 영웅 역도산의 제자로 일본에서도 수많은 명승부를 펼친 거장이었다.일본 언론들은 김일 선수의 별세 소식을 전하며 “일본 프로레슬링계에도 큰 업적을 남긴 명선수였다”고 애도하고 있다.민영방송들은 “일본에서 활동했던 박치기 왕이 숨졌다”며, 당시 경기 모습 등을 소개했다.닛간스포츠는 “58년 일본에 건너 온 김 선수가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영웅으로 성장했지만, 박치기 후유증으로 뇌혈관 질환에 시달리기도 했다”며, 파란만장한 박치기 인생을 보도했다.지난 달 26일 그의 빈소에는 왕년의 라이벌었던 안토니오 이노키도 일본에서 급히 찾아와 고인의 넋을 기렸다.김일 선수는 지난 1956년 일본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한국계 프로레슬러 역도산을 동경해 일본에 밀입국했다. 불법 입국 혐의로 체포돼 수용소 있던 김일을 역도산이 신원보증을 하며 제자로 맞아들였고 김일은 역도산의 뒤를 이을 수제자로 떠올랐다.그 뒤 안토니오 이노키,자이언트 바바와 함께 김일은 일본 프로레슬링계에 젊은 트리오로 불리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일본 무대에서 세계 헤비급 타이틀을 획득했고 동료이자 라이벌이던 안토니오 이노키와는 수많은 명승부를 펼쳐 일본 프로레슬링 전성기를 이끌었다.지난 1981년 김일 선수는 일본 프로레슬링 무대를 완전히 떠났다. 그러나 1995년 도쿄돔에서 은퇴식을 가질 정도로 일본 프로레슬링의 역사와도 뗄 수 없는 인연을 남겼다.김일 선수는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감한 듯, 지난 2월에는 도쿄 아오야마에 있는 스승 역도산의 묘지를 찾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