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왕' 김춘삼은 5대 협객이었다"

거지왕 故 김춘삼의 오른팔 ‘망치’ 류재호씨 단독 인터뷰

2006-12-04     김종국 기자

전후 50년대 김두환, 이정재, 시라소니, 이화룡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주먹 1세대, 5대 협객 중 하나로 손꼽혔던 ‘거지왕’ 김춘삼씨가 지난 달 27일 향년 78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전쟁 고아를 위해 설립된 합심원(고아원) 시절부터 그의 오른팔 역할을 해왔던 ‘양아들’ 류재호씨(일명 ‘망치’)에 따르면 “고인은 5ㆍ60년대 5대 협객으로 공히 꼽히시는 분이지만 그분들과는 격과 질이 다르게 정치와 권세를 멀리한 진정한 사회사업가”였다고 말했다.

故 김춘삼씨는 슬하에 장성한 2남 2녀를 두고 있다. 그러나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10평 남짓한 연립주택에서 스스로 ‘무소유’정신을 실천하며 돈 없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을 위해 외길인생을 걸어왔다.
빈소에서 만난 맏아들 김흥식씨(55ㆍ필리핀 대학교수)는 “아버지께서 따로 유언을 남기지는 않으셨지만, 평소 우리들에게 ‘이름 석 자와 가난을 남기고 간다. 너희들도 어렵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살아라’란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말했다.

인은 1928년 평남 덕천에서 출생, 전쟁고아를 위한 합심원을 전국 20여 곳에 설립하고 거지와 직업여성의 합동결혼식을 거행했으며 자활개척단, 빈곤추방국민운동연합, 공해추방국민운동본부에서 노숙자 없는 세상, 공해 없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쉬지 않고 활동을 펼쳐 왔다.


“베풀길 좋아했던 김춘삼”

지난 달 28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천주교 청담성당 영안실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에는 현직 국회의원, 보훈처 장관, 인컴아트테크놀러지 대표이사, 한국폴리텍 대학 총장, 연예인 민주환 씨 등 각계각층 저명인사들의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전후 50년대 헐벗고 굶주리며 암울했던 시절, ‘소외되고 의지할 곳 없던 많은 이들의 어버이’로 불렸던 故 김춘삼씨의 장례는 성교예규에 따라 천주교식으로 차분하게 진행됐다.
상주 김흥식씨는 “어릴 시절부터 아버지는 굉장히 큰 분이셨다”며 “공인으로서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엄격했지만 따뜻한 분이셨다”고 회상했다.

대학생인 손자 김겨레씨(21)는 “할버지께서 오랜 투병 생활 끝에 편한 곳으로 가셨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는 이미 하고 있었다”며 “많은 시간 함께하지 못했지만 커가면서 정말 좋은 일들을 많이 하신 것을 알아,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미망인 남윤자씨(64)는 착잡한 심경으로 인해 기자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러나 그동안 언론을 통해 “남에게 베풀길 좋아했던 영감은 어려운 경제상황에도 단 한 번도 후회하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입장을 밝혀왔다. 이에 <매일일보>은 합심원 출신으로 고인의 양아들, 망치 류재호씨(62ㆍ공해추방국민운동본부 환경감시 단장)와의 인터뷰를 통해 김춘삼씨의 어제와 오늘을 들어봤다. 류씨는 지난 8월부터 고인을 병간호하며 마지막을 지켜드린 또 한 사람의 유족이자 생전에 고인의 오른팔이었다.

죽기 전 “노숙자 문제 해결 의지” 밝혀

지난 8월부터 노령과 폐질환으로 병상에 눕게 된 고인 옆에서 석 달 열흘을 지켜봤다는 류씨는 심경을 묻는 질문에 “받은 사랑 되갚을 길이 없었다. 그저 사경을 헤매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내리 사랑이구나”하고 말문을 열었다. 합심원 때부터 고인 옆에서 활동해 지금은 고인을 제일 잘 안다고 소문난 ‘망치’ 류재호씨. 항상 김춘삼씨 곁에 있었냐고 묻자 “그렇게 못했다. 고아원 출신으로 선생님의 사업에 욕이 될까봐 큰 사업 하실 때는 곁에 없었지만 외롭고 힘드실 때 마다 그림자처럼 나타나곤 했다”고 말을 이었다.

유언에 관해서는 “선생님께서 의식이 마비된 상태라 임종할 때 특별히 남긴 유언은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기억난다”며 “어떻게 21세기에도 이렇게 거지가 많냐, 서울역에 있는 거지들을 도와야 하는데, 또 중국에 있는 수많은 탈북자 문제는 어쩌면 좋겠냐고 한참을 걱정했다”고 한다.
깊은 병환에도 불구하고 김춘삼씨는 “죽기 전에 대통령을 만나 노숙자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안타까운 시선과 격려를 받았다고 류씨는 전했다. 

“뒷골목의 입법자이자 희망”

김춘삼씨는 서울ㆍ부산ㆍ대전 등 전국 20여 곳에 고아원을 설치해 거지와 고아를 구제하고 선도하는 사업을 펼쳤다. 56년에는 전국고아원협회 회장으로 추대 됐는데, 50년대 합심원(고아원) 시절은 어땠는지 류씨에게 물어봤다.“합심원의 설립년도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다만 나는 선생님의 도움으로 합심원에서 자랐고 좀 커서는 어른들 심부름도 하고 골목대장 역할도 했다. 경찰의 도움을 받아 감찰반장 완장도 차보고 비슷한 처지의 부랑자와 걸인을 돌보곤 했다.”또 최근에 합심원 출신 조모씨가 언론에 나와 고인을 비방한 사실에 관해 류씨는 “그 사람이 인면수심 대도(大盜) 조세광이다. 합심원에 있을 때 밀가루와 수제비만 줬다고 고인을 욕보였지만, 그 시절에 고아인 우리 처지에 그것도 과분한 것이었다. 그런 배은망덕한 원생에 대해서 고소하자는 말들이 많았지만 선생님은 다 내 자식이라며 스스로를 낮춰 조용히 넘어 가자고 할 만큼 도량이 큰 분이셨다”고 말했다.50년대 후반 합심원 활동이 활발해 지면서 김춘삼씨의 선행은 신문ㆍ잡지에 오르내리게 됐다. 당시 이화여대 학생들은 봉사활동을 자청하기도 했는데 류씨는 이와 관련해 “학생들이 나와서 아이들을 목욕시키고 방청소도 하고 노래도 함께 부르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고 회상했다.

사비 털어 결혼반지 2천여 개 선물

김춘삼씨는 돈이 없어 결혼을 못하는 거지와 성매매 여성의 혼약을 성사시켜 약 2천 쌍이 넘는 커플을 탄생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한번에 1017쌍의 결혼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류씨는 “고인은 원래 스케일이 크고 생각이 기발해서 합동결혼식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후 곧바로 실천으로 옮겼다”며 “여성들은 대부분이 직업여성이었지만 공장에 일하는 분, 소식을 듣고 자진 참가한 분들도 많았다”고 말했다.

당시 합동결혼식을 거행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지 묻자, 류씨는 두 가지를 언급했는데 우선 ‘선생님께서 사비를 털어 결혼반지 2천여 개를 신혼부부에게 선물로 나눠준 것’을 꼽았고 다음으로 ‘결혼식을 방해하는 기둥서방(포주)로부터 동대문과 청계천 사창가 여성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그 일대 기둥서방(포주)과 맞서 싸워야 한 점’을 들었다.

 “드라마 왕초 사실과 달라,,, 철저한 사회사업가”

99년 방영된 MBC 드라마 ‘왕초’에서 그려진 김춘삼은 큰 주먹 김두환, 이정재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또한 거지왕으로서 거지들이 도둑질과 동냥질을 못하게 합심원과 자활개척단(국토개발사업)을 꾸려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등 갖가지 구제 사업을 펼친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를 다른 주먹들과 마찬가지로 싸움꾼이나 여자를 밝히는 한량과 같은 이미지로 묘사해 논쟁이 일기도 했다. “드라마라 픽션이 많이 가미된 것 같다. 선생님을 싸움박질이나 하고 요정이나 드나드는 사람으로 묘사됐지만 김두환, 시라소니, 이정제, 이화룡, 유지광, 이런 분들과는 질과 격이 다른 분이셨다. 장장했던 이분들은 오직 권세와 명예를 위해 주먹을 쓰고 실리를 챙겼지만 고인은 철저한 사회사업가로 사리사욕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류씨는 이어 “동대문 일대는 세력 확장을 위한 각 계파 간 싸움이 빈번했다. 거지들과 매춘여성을 지키기 위해 선생님은 어쩔 수 없이 주먹세계와 연루됐는데, 주먹을 쓰긴 했지만 협객들과는 대립관계가 아닌 상호협조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시라소니, 유지광과는 말년까지 우정이 깊었는데 시라소니에게는 교회를 내주었고, 유지광의 장례 때는 장례위원장을 맡을 정도로 친밀했다”고 밝혔다.시라소니에게 왜 교회를 내주었냐고 묻자, 류씨는 “사나이 시라소니가 주먹계를 은퇴 한 뒤 교회에 다녔다. 그런데 그 교회가 개척교회이다 보니 변변한 예배장소가 없어 고민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님은 운영하던 권투도장을 선뜻 내주며 교회 예배당으로 쓰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소박한 말년, 환경운동의 르네상스를 꿈꿔

故 김춘삼씨는 지난 94년 환경운동의 제2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사)공해추방국민운동본부를 설립했다. 거지왕이 환경 운동을 한다는 게 좀 낯설어 평소 고인의 환경운동에 관한 철학을 물었다.
류씨는 “선생님은 ‘환경운동이란 내 앞에 떨어진 종이 하나 줍는 것이다’라고 늘 말씀하셨는데, 공해추방운동본부 활동을 정말 열심히 하셨다. 본부에서는 전국에 환경감시단을 파견하고 한강 보살피기, 환경 예술제 등 굵직한 사업을 펼쳤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김춘삼씨의 말년은 그의 화려한 경력과 견주어 볼 때 소박했다. 알려진 대로 서울 망원동의 10평짜리 연립주택에서 기초생활수급자 보조금과 6ㆍ25 참전 지원금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장성한 자식들을 염두해 본다면 생활이 왜 그렇게 어렵기만 했는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분은 사는 것 자체가 ‘無所有주의’셨고 주머니에 돈이 생기면 다 털어서 남을 줬다. 어려운 후배, 이웃에게 생길 때마다 다 나눠 주니 어떻게 넉넉하셨겠냐.” 류씨의 설명이다.

이러한 김춘삼씨가 일각의 평가처럼 깡패라고 오해받는 것에 대해 류씨는 “말년까지 거지의 무소유 정신을 실천하며 검소하게 살다간 선생님이다. 제발 깡패로, 주먹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지 말아 달라”고 거듭 당부했다.지난달 30일은 거지왕 故 김춘삼씨의 발인이었다. 유가족들은 장지인 대전국립현충원으로 고인을 모시기 전 의형제 김두환과 추억이 설인 청계천 수표교에서 노제를 지냈고, 여의도 동아일보 앞에서 걸 판진 각설이 타령을 벌이며 마지막으로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현재 합심원 출신 원생 대부분은 하늘나라로 갔다. 류씨에 따르면 살아 있는 분들은 공무원, 법조인, 목사, 스님, 사업가 등으로 활약하며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김종국 기자<jayzaykim@sisa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