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식들 몰래 데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다"

한맥영화사, 시네마서비스 상대 항소심도 패소…“보상 받고자 한 것 아닌데”

2007-12-18     김종국 기자

영화 ‘실미도’는 천만 관객 시대를 연 장본인이자 37년 동안 감춰진 역사의 비밀을 폭로해 한반도를 뜨겁게 달궜던 시대의 화두였다.

2003년 12월에 개봉돼 2004년 2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684부대 실사 확인’이 뒤따르면서 실미도 사건과 훈련병 실체 대한 논란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에 국가차원의 진상조사 결과물이 2006년 7월 발표되면서 1급 국가 비밀의 베일이 벗겨지는 듯 했다.

실미도 684부대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대북침투를 위해 창설되었고, 훈련병들의 신상은 순수 민간 청년들로 드러났다. 이에 실미도 훈련병 유족회는 작년 8월 강우석 감독과 영화 제작사를 상대로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 항소심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지난해 7월 원심 판결에 이어 영화계의 손을 들어줬다. 잇따른 패소 판결에 유가족들은 심경은 어떤지 <매일일보>이 들어봤다.

지난 11일 서울고등법원(부장판사 심상철)은 실미도 ‘684부대’ 훈련병 유가족들이 강우석 감독, 시네마서비스, 한맥영화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 항소심에서 원심과 같이 원고 패소판결을 내렸다.원고인 김기태씨 등 유족 59명은 2003년 12월에 개봉된 영화 ‘실미도’에서 “684부대 훈련병들을 살인범, 무기수, 사형수, 용공주의자 등 악질ㆍ흉악 범죄자 혹은 사회 낙오자로 표현해 유가족들의 명예를 심히 훼손했다”며 지난해 8월 항소를 제기했다. 재판부는 이번 판결문에서 “강우석 감독을 비롯한 피고인들이 ‘실미도’ 사건 사망자를 범죄자나 용공주의자 등으로 표현한 것은 원고들의 명예를 훼손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으나 극중 2명을 제외한 나머지 훈련병들에 대해서는 모집경위나 출신성분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며 영화사측의 손을 들어줬다. 또 용공주의자 묘사에 관해서도 “훈련병들이 북파공작을 목적으로 한 특수부대원들이어서 북한 군가를 알고 있었고 영화에서 ‘적기가’라고 표시하지 않아 관객들도 북한 군가임을 알기 어려웠으며, 관객들이 훈련병들에 대한 경멸보다 추모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어 명예를 훼손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속, 누가 알까

이번 판결과 관련 실미도훈련병유족회(회장 김기태)는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려 왔는데 정말 답답한 심정”이라며 “영화사를 힘들게 하고 보상이나 받자고 항소한 게 아니다”고 말문을 열었다.
김기태 회장은 “억울하게 죽어간 아들ㆍ형제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인데 그 큰 영화사들이 공식적인 사과 한번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우냐!"며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실제 영화제작사 측에서는 2003년 당시 영화 ‘실미도’가 역사적 실화를 바탕으로 사실적으로 묘사된 것으로 홍보했다. 그러나 그간의 논란의 핵심이 됐던 훈련병의 신상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분히 왜곡된 묘사를 한 것으로 지난 7월 13일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발표로 확인된 바 있다. 국방부 산하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31명의 훈련병들은 죄질이 나쁜 특수범이나 현역군인이 아닌 민간 청년들이었으며, 중앙정보부는 높은 보수를 미끼로 이들을 모집해 3년 4개월간 무인도에서 강제로 격리해 기본권을 박탈하고 사실상 구금상태로 두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국방부의 진상조사 발표에 따라 훈령병 유가족들은 2005년 7월 서울중앙지법의 1심 패소 판결이 항소심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했다. 또한 유가족에 대한 정부의 대책마련도 급물살을 타고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자가 확인해 본 결과 판결도, 대책도 2004년, 2005년 상황과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훈련병 유가족 증언으로 영화 만들어 졌어야

‘네 명 중 한명이 봤다’는 영화 ‘실미도’는 아직도 케이블 채널에서 심심찮게 방영되고 있다. 게다가 모 리서치기관의 ‘실미도 훈련병에 대한 인식 조사’에 의하면 영화를 본 80%의 관객들이 훈련병들을 ‘범죄자’나 ‘사회 이탈자’로 바라보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 유족회 이명철 총무는 “첫 단추부터 잘 못 끼워진 거다. 처음 영화를 만들 때부터 훈련병들의 생생한 증언이 아닌 기간병과 고위 공직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영화를 제작했으니 이런 비극을 초래한 것”이라고 일갈했다.사실 영화 상영 이후부터 국방부 진상조사가 종결되는 시점까지 실미도에 얽힌 무수한 논쟁이 있었다. 훈련병 유가족과 기간병 유가족의 주장이 엇갈렸고 목격자들의 억측이 난무했으며 심지어 기간병 모임인 ‘실미도전우회’에서는 故 김방일 전 회장과 김양구 현 회장 간의 실미도 사건 실체를 놓고 서로의 주장이 옳다며 공개토론도 불사할 정도였다.

이에 대한 이 총무의 설명이 의미심장하다.
“논란의 와중에서 유가족들은 기막히고 억울해서 두세 번 죽었지만 영화 제작사 측에서는 그 모든 논쟁이 '실미도 마케팅'에 일조한다는 걸 알고 수수방관하며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우리는 강우석 감독과 접촉도 못해봤고 제작사 측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신문이나 방송에 '영화는 사실과 다르다'고 죄송하다고 한번 하면 될 것을...” 

이에 ‘실미도’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모든 이들은 지난 7월 국방부 발표에 기대를 걸고 항간의 속설들이 일괄ㆍ명확하게 정리되고 유가족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뤄지기를 희망했다.발표에 따라 이론적으론 실미도 684부대와 부대원, 탈주 후 버스에서 있었던 일, 사상자 신원 문제 등은 상세하고 신빙성 있게 드러나면서 일단락됐다. 게다가 사망한 훈련병이 가매장된 경기도 벽제동에서 유골 발굴 작업도 이뤄져 훈련병 31명 가운데 무연고자 8명을 제외한 23명의 신원이 확인됐다.

시신 발굴한다고 아들들 파헤쳐 놓고 아직도 막사에

그러나 발굴된 유해에 대한 처리가 1년이 넘도록 답보상태에 있다. 이와 관련 김기태 회장은 “국방부와 공군은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감 있는 자세로 장례와 보상 문제에 임해야 하는데, 시신 발굴한다고 형제ㆍ자식들 파헤쳐 놓고 아직도 군부대 내 텐트에 처박아 두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보상 문제와 향후 대책에 대해서도 “금전적인 보상? 이뤄진 게 없다. 보상 문제와 대책을 마련해 놓지도 않고 국방부와 공군은 일단 시신 화장부터 하란다. 이게 말이 되냐.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며 김 회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그러나 기간병 사망자 시신은 이미 국립묘지에 안장됐으며 영화사의 후원까지 받아 공주 공군교육대대 내에 위령비까지 세운 상황이다. 이에 대해 인터뷰를 이어 받은 이명철 총무는 “위령비는 고사하고 1년째 군부대 막사 안에서 방치돼 있는 우리 아들들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통이 터진다”며 “순수한 청년들을 국가가 몰래 데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고 가족에게 연락을 취할 생각도 않고, 이게 '유괴 후 살인'과 뭐가 다르냐”며 항변했다.

공군측에 따르면 발굴된 시신은 충북ㆍ대전 군부대 지역 일대 ‘국유지’에 매장될 계획이다.
유가족들은 없는 살림에 수천만 원의 돈을 들여 국방부와 영화사를 상대로 소리 없는 싸움을 이어왔다. 하지만 실오라기 희망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대했던 항소심마저 패소하고 이들에게 이제 남은 것은 꽃다운 청춘을 펼쳐 보지도 못한 채 싸늘한 주검, 아니 한 줌 흙으로 돌아 온 한 많은 망혼들 뿐이다. 

논란의 거품이 지나간 자리에 홀로 남은 실미도 훈련병 유족회는 답답하고 막막한 처지에 있다. 자리를 뜨는 기자에게 김 대표는 “지금은 모두가 무관심할 뿐, 매일 같이 걸려오는 유가족들의 전화를 이제 어떻게 받냐”고 눈시울을 붉혔다.
김종국 기자<jayzaykim@sisa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