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십자家, 끝나지 않는 '쩐의 전쟁'[풀스토리]

'아버지는 동생들과 함께 회사 물려받기를 바랬다'

2010-11-18     황동진 기자

[매일일보=황동진 기자] 최근 제약업계에서는 녹십자의 거침없는 행보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 기세라면 업계 1위 동아제약의 아성을 허물어뜨릴 날도 멀지 않았다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하지만 이런 전망에도 불구하고 녹십자의 낯빛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녹십자는 해를 넘겨 오너 일가의 상속 분쟁으로 속앓이를 해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자칫 경영권 분쟁으로 비화, 회사에까지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하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이들 간 분쟁이 끝나지 않는 한 녹십자는 발목에 족쇄를 차고, 걷는 셈이다.

창업주 유산 놓고 장남과 어머니 간 피도 눈물도 없는 해 넘긴 공방
장남, 1심 패소 후 바로 항소, 지난 8일 복지재단 상대로도 소송 제기  

 

“기업은 더 이상 이윤을 추구하는 맹목적인 집단일 수 없습니다. 기업은 인격을 가져야 하며 낮은 곳으로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기업은 세상의 모든 사랑을 추구해야 합니다.”

고(故) 허영섭 녹십자 회장이 살아생전 늘 강조했던 말이다.

하지만 허 회장의 올곧은 정신은 대를 잇지 못했다. 그것도 그가 세상을 떠난 바로 직후에 벌어졌다.

지난해 11월 허 회장이 지병으로 타계하자마자 유족들 간 상속 다툼이 발생한 것. 그것도 아들이 어머니를 상대로 소송을 내는 경천동지할 사건이 벌어졌다. 

창업주 유산 분쟁, 현재 진행형

분쟁의 발단은 허 회장이 남긴 유산을 두고 장남 성수(40)씨가 어머니 정모씨를 상대로 지난해 12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유언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면서 점화됐다.

허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한 달 만여 만에 일이었다. 성수씨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병중에 임의대로 유언을 작성케 해 자신은 유산을 전혀 상속받지 못하게 됐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성수씨는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수술 이후 장남의 병원 방문도 막고 일방적으로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어머니의 의사에 맞춰 유언장을 작성했다”며 “아버지는 수술 이후 자발적 언행이 불가능했음에도 이후 작성된 유언장은 구술이 아닌 서면으로 전달됐다”고 주장했다.

또 “아버지는 생전에 장남을 배제하고 재산을 상속하겠다는 뜻을 밝힌 적이 없으며 오히려 장남이 동생들과 함께 회사를 물려받아 백신사업과 신약개발을 이어가길 바랐다”고 강조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허 회장은 보유 중이던 녹십자홀딩스 주식 56만여주 가운데 30만여주와 녹십자 주식 26만여주 중 20만여주를 사회복지재단 등에 기부하고, 나머지는 부인과 차남과 삼남에게 물려주도록 유언장을 남겼다.

당시 제약업계에서는 리베이트 의혹과 영업사원들의 잇단 자살 소동 등으로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을 때였다. 잘나가던 녹십자 역시 비슷한 이유로 분쟁을 치르게 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분위기는 더욱 침울해 졌다.

업계에서는 우려를 나타냈다. 으레 그렇듯 재벌가 오너 일가의 재산 다툼은 대부분 경영권 분쟁으로 비화되기 때문이다.

성수씨 역시 아버지 허 회장이 생전에 장남이 동생들과 함께 회사를 물려받기를 바랐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봤을 때, 단순히 유산 때문만은 아닌 경영권까지 염두에 둔 소송이란 것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현재 성수씨의 동생들인 은철(37)씨와 용준(35)씨는 각각 녹십자 전무와 녹십자홀딩스 상무로 회사 경영에 참가하고 있다. 성수씨는 지난 2007년 녹십자 부사장으로 근무했으나 이후 회사를 떠나 외국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일까. 녹십자는 발 빠른 대응에 들어갔다. 부랴부랴 이사회를 열고 허 회장의 후임으로 친동생인 허일섭 부회장을 선임시켰다.

녹십자의 이같은 대응에 사건은 크게 확산되지 않고 봉합 국면으로 접어드는 듯 했다.

분쟁 장기화 될수록 녹십자 악재로 작용

그러나 세간의 눈과 입을 일단 피하기는 했지만, 법정 공방은 해를 넘겨 이어졌다. 먼저 승기를 잡은 쪽은 성수씨였다.

지난 2월 법원은 성수씨가 낸 ‘유언효력정지’ 신청을 받아들였다. 성수씨의 주장에 법원은 유언장이 작성될 시 장남 성수씨만 제외됐다는 점으로 미뤄 유언의 유효성에 의심할 만한 합리적 근거가 있다고 판단,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본안 소송에서 형세는 역전됐다. 지난 10월 서울중앙지법 민사 13부는 사망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어머니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재판부는 섬망증을 앓았던 허 회장이 오전에 좋아지고 오후에 나빠지는 상태를 보였는데, 유언장은 오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아 당시 허 회장이 유언을 남길 시에는 의사식별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이에 불복한 성수씨는 곧바로 항소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어머니 쪽으로 형세가 기운 만큼, 이들 간 분쟁은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업계의 판단은 착오였다. 성수씨는 방향을 틀어 이번엔 아버지의 유산을 기부 받은 녹십자 산하 장학재단을 상대로 ‘유류분 반환청구’ 소송을 냈다.

지난 8일 성수씨는 소장에서 “아버지의 유언은 의식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작성돼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생전 의사와도 부합하지 못해 무효”라며 “A장학재단 등은 (무효 유언에 기인해) 녹십자홀딩스 및 녹십자 주식 약 8만주와 현금 4000만원을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수씨의 지칠 줄 모르는 맹공에 녹십자도 짐짓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겉으로는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녹십자 관계자는 “이번 건 역시 회사 차원에서 드릴 말이 없다”며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고 일축했다.

유산 분쟁, 경영권 분쟁으로 확대?

하지만 업계에서는 쉽게 봉합될 것으로만 보였던 녹십자 오너 일가의 상속 분쟁이 장기 국면으로 치달으면서 경영권 분쟁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로 인해 회사에 직간접적이나마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증권업계 한 관계자에 따르면 “녹십자는 올 3분기 백신제제 매출성장과 해외수출 부문 호조로 1920억원의 매출액을 달성했고, 지주사인 녹십자홀딩스 역시 3분기 매출액 892억원을 기록했는데, 이 추세라면 업계 1위인 동아제약의 아성도 허물어뜨릴 날도 곧 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고 평가했다.

이어 “하지만 녹십자는 현재 창업주의 유산을 놓고 유족 간 상속 분쟁이 장기 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만큼, 대주주 및 기업 이미지 하락, 대외신인도 추락 등으로 이어져 끝내는 회사의 악재로 작용할 소지가 다분히 있다”며 “만일 법정 공방에서 장남이 최종 승리할 경우에는 ‘경영권 분쟁’으로 이어지지 않으리라고도 단정 내릴 수 없는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지난 15일 고 허영섭 회장의 1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이날 유가족과 회사 임직원 300여명이 참석했으며, 장남 성수씨 또한 껄끄러운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석했다.  

여하튼 녹십자 오너 일가의 상속 분쟁이 갈수록 점입가경으로 빠져들고 있는 가운데, 재벌가에서 통용되는 ‘돈은 피보다 진하다’는 말과 오버랩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