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 회장 선출 무산 '46년 만에 초유의 사태'
강신호, 조석래... '70넘으면 회장직 넘보지마?'
2008-03-10 권민경 기자
[134호 경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신임 회장 선출이 또 다시 무산됐다. 전경련은 지난달 27일 정기총회를 열고 차기 회장 선출문제를 논의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총회 직전까지 만해도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이 차기 회장으로 추대될 것으로 점쳐졌지만, "(나를 포함해)나이가 70에 가까운 사람은 회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대림산업 이준용(69) 회장의 충격(?) 발언으로 회의장은 일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조 회장의 나이가 올해로 72세인 것을 감안했을 때, 이 회장의 발언은 다분히 조 회장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 회장이 '세대교체'를 이유로 라이벌인 효성의 회장이 전경련 실권을 쥐는 것에 제동을 걸었다는 지적까지 제기됐다. 이유야 어찌됐든, 이로써 전경련은 창설 46년만에 회장 선출 실패라는 초유를 사태를 맞게 됐다. 더욱이 이번 회장 선출 과정을 통해 전경련 내부의 갈등과 반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재계 안팎에서는 '전경련 무용론'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얘기되고 있다.
이날 갑작스레 마이크를 잡은 이 회장은 작심한 듯 말을 쏟아냈다. 그는 "주변에서 회장을 해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어차피 '때려죽여도 안 할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자꾸 나한테 공을 던지는 것 아니냐"고 거침없이 말했다. 이어 "강신호 현 회장으로부터 '당신이 한번 맡아보라'는 제안을 받았다"며 "그러나 나이가 너무 많아 못하겠다고 했다. 이제는 70 가까이 된 사람들은(전경련 회장직을)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고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강하게 역설했다. 또 "내일 모레가 환갑인 젊은 총수를 추천했는데, 강신호 회장이 '그 사람은 너무 젊지 않느냐'며 난색을 표했다"는 자세한 얘기까지 곁들였다. 그동안 전경련 총수들의 모임은 대부분 비공개로 열리고, 차기 회장 선출을 위한 논의 또한 전경련 직원들조차 "아는 것이 없다"고 일축할 만큼 비밀스럽게 진행돼왔다. 때문에 이 회장의 이날 발언은 전경련 내부에서 일고 있는 총수들간의 갈등과 반목을 여과 없이 보여준 것이었다. 특히 '70대 불가론'은 이 회장 자신이 회장직에 뜻이 없다는 사실을 설명함과 동시에 조석래 회장에 대한 반대의사를 명백히 밝힌 것으로, 차기 회장을 둘러싸고 조 회장을 지지하는 회장단과 그렇지 않은 회장단 사이에 불협화음이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재계, "회장 선출 놓고 그간의 갈등 표출된 것"
전경련 내부의 갈등은 이미 지난 1월25일 열렸던 회장단 회의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당시 회의의 주요 논제는 차기 회장 선출. 이 자리에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강력한 지지(?)로 강신호 현 회장의 재추대가 결정됐다. 물론 회장단 내의 일부는 아들과의 갈등, 동아제약 경영권 분쟁 등의 이유로 강 회장 연임에 반대 의사를 비친 것으로 알려졌지만, 강 회장이 "꼭 (회장)을 하라고 한다면 아직은 건강이 괜찮은 만큼 열심히 해보겠다"는 수락 의사를 밝혀 연임이 확실시되는 듯 했다. 그러나 동부그룹 김준기 회장이 '개혁부진'을 이유로 돌연 전경련 부회장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히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김 회장 사퇴는 겉으로는 '전경련이 변화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지만, 강 회장 연임에 대한 반발의 뜻을 밝힌 것이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결국 아물지 못한 상처는 지난달 27일 또 한 차례의 정기총회를 통해 더욱 크게 벌어진 것이다. '회장전형위원회'의 대표인 김준성(87) 이수그룹 명예회장은 이날 "전경련의 위상이 더 이상 추락하는 것을 막으려면 오늘 회장을 뽑아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약 40분간의 회의 끝에 결국 회장 선출은 연기되고 말았다.전경련, 이대로 '무기력'하게 주저앉을까
사상 초유의 사태로 전경련은 창설 이후 46년만에 '회장'을 선출하지 못하는 불명예스러운 상황을 맞게됐다. 전경련 한 관계자는 이번 사태에 대해 "글세…당하고 보니까 일이 그렇게 됐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재계는 전경련의 이번 분열이 비단 회장 선출에 관련된 것뿐이 아니라 회원사간에 쌓여온 불신과 갈등이 선출 문제를 계기로 터져 나온 것이라 보고 있다. 실제로 전경련은 삼성 이건희, 현대차 정몽구, LG 구본무, SK 최태원 회장 등 4대 그룹 총수들의 계속된 불참과 무관심으로 '구심점'을 잃고, 위상이 흔들려왔다. 전경련 총수 모임은 참석하는 몇몇 그룹 회장들간의 '친목회' 정도로 전락했고, 재계의 이익과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 또한 제대로 해오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지난달 27일 정기총회 자리에도 강신호 회장과 조건호 상근부회장 외에 효성 조석래 회장, 대림 이준용 회장, 류진 풍산 회장,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과 '회장전형위원회' 대표인 이수 김준성 명예회장만 참석했을뿐 4대 그룹을 비롯한 30대 그룹 총수들은 대부분 불참했다. 김준성 이수그룹 명예회장은 정기총회에서 "(대기업 회장들이 전경련에 나오지 않아) 전경련을 해체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며 "내 나이가 88살인데, 전경련 회장을 추대하러 삼성 회장 등을 찾아다녀야 하느냐"고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한편 전경련은 빠른 시일내에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3월 안에 차기 회장을 선출한다는 계획이다. 조건호 상근 부회장은 "현재 전경련 차기 회장 의사를 밝힌 사람이 몇몇 있다"면서 "이전부터 회장직을 맡고자 하는 의사가 있었던 분들이 계신 것 같다"고 말했다.이어 "조석래 회장 역시 차기 회장 논의 대상에 포함된다"며 "조 회장이 여전히 유력한 회장 후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계 안팎에서는 "회장 선임을 둘러싼 분열이 쉽게 봉합되지 않을 것"이라 보고, 전경련이 무기력한 경제단체로 전락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