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 '거침없이 하이킥' 날리는 속내는
'경제위기론' 애국심의 발로인가, 또 다른 꼼수인가
2008-03-24 권민경 기자
[136호 경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잇따른 '경고성' 발언에 정, 재계가 '움찔'하고 있다.
지난 9일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2007 투명사회협약 대국민 보고대회'에서 이 회장은 "나라 전체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5~6년 뒤엔 위기가 온다"고 힘주어 말했다. 지난 1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에서 "중국은 쫓아오고 일본은 앞서 가는 상황에서 한국은 '샌드위치' 신세"라고 말한 데 이어 또 다시 한국경제의 위기를 설파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국내대표기업 총수의 거침없는 발언에 대한 정치권과 재계의 각기 다른 해석. 한편에서는, 한국경제를 진단하는 이 회장의 통찰력에 맞장구를 치며 그의 '혼란'경고를 경청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심지어 이 회장의 경고가 "임진왜란 직전 국난을 예고한 이율곡 선생의 걱정과도 같다"며 그의 애국심(?)을 높이 사기도 했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뭔가 '의도'가 담긴 발언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즉 에버랜드 CB 사건을 둘러싼 삼성과 이 회장 일가에 대한 비난 여론을 잠재우고, 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일종의 '꼼수'가 아니겠냐는 지적이 그것이다.
한나라당, 주요 언론 "이 회장 경고 새겨들어야"
이 회장의 '경제위기론' 발언이 나오자마자 언론과 정치권 일각에서는 적극적으로 공감을 표시했다. 주요 일간지들은 지난해 삼성전자의 순익, 매출 등 수익악화를 설명하며 이 회장이 '위기론'을 들고 나온 배경을 설명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그런가하면 "이 회장의 경고를 새겨들어야 한다" "이 회장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우리 경제의 상황을 고민해봐야 한다"는 내용의 사설이 주를 이뤄 이 회장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케 했다. 정치권 역시 예외는 아니었는데, 특히 한나라당은 이 회장 발언에 국민 모두가 동감하고 있다고 판단(?)하며 동시에 청와대의 태도를 맹 비난했다. 청와대는 지난 13일 청와대 브리핑 연재시리즈인 '위기론을 돌아본다'의 4탄으로 '청개구리 신문들의 때아닌 경제위기 타령- 쪽박 때 쪽박 아니라던 그들이 무슨 염치로'라는 글을 실은 바 있다. 이 글에서 "최근 한 대기업 회장의 '정신차려야 한다'는 발언을 (언론이)침소봉대해 위기론의 중요한 논거로 삼아 더욱 호들갑을 떨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경제에 대해 무조건 장밋빛 전망만을 내놓는 것도 옳지 않지만 필요 이상으로 비관만 하는 보도 행태는 그 의도가 무엇인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에 한나라당은 청와대가 오만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고 신랄하게 꼬집었다. 한나라당 유기준 대변인은 14일 "모두 정신차리지 않으면 5~6년 내에 큰 위기가 온다는 이 회장의 발언에 국민들이 공감하고 있다"며 "노무현 정부의 경제성과를 보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오만의 극치"라고 비판했다. 유 대변인은 또 "국민들은 우리 경제에 청와대보다 기업의 기여가 더 크다고 볼 것"이라면서 "청와대의 난청은 의도적, 선천적으로 치유불가 상태다. 눈이 없으면 귀라도 열라"고 꼬집었다.경제정책을 책임지는 재정경제부에서도 이 회장의 발언에 장단을 맞췄다. 재경부 조원동 경제정책국장은 지난 13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과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성장 잠재력을 걱정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며 이 회장의 경제 진단에 공감을 표시했다.심상정 의원 "위기 불러오는 것 '재벌'의 탈·불법 때문"
반면 이 회장의 연이은 '위기론' 발언을 둘러싸고 전혀 다른 지적도 제기됐다. 실체도, 대안도 없는 '경제위기론'을 통해 이 회장이 뭔가 다른 것을 노리고 있다는 의심의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것. 즉 에버랜드 CB사건을 둘러싼 국민의 비난 여론과 삼성에 대한 공정위의 경계 등을 잠재우고 '경제가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 재벌과 코드가 맞지 않는 참여정부를 압박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얘기다. 일부 언론은 특히 이 회장의 발언이 에버랜드 사건 수사 일지와 묘하게 맞물려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난 15일 서울 고등법원은 석 달만에 에버랜드 사건 항소심 재판의 변론을 재개했다. 이미 지난 1월 18일 선고기일이 잡혔다가 검찰이 내놓은 공소사실 가운데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연기된 것이어서, 이번에는 선고까지 오랜 기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따라서 이 회장에 대한 조사방식과 기소 여부에 또 다시 관심이 쏠리고 있는 상황. 이처럼 미묘한 시기에 이 회장이 '위기론'을 들고 나오자 일각에서는 '경제 제일주의'를 강조해 수사를 물타기 하려는 꼼수를 부리고 있다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사실 이 회장이 '샌드위치 위기론'을 들고 나왔던 시기 역시 에버랜드 전, 현직 사장에 대한 선고가 연기된 직후였다. 검찰 안팎에서는 벌써부터 이 회장이 뿌려놓은 '경제위기론'을 참작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흘러나오며 이 회장 기소 여부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는 추측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한편 대표적인 삼성 저격수로 알려져 있는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은 '위기'를 불러오는 것은 다름 아닌 재벌이라고 지적했다. 심 의원에 따르면 재벌이 탈법과 불법을 통해 봉건적인 경영세습을 반복하고, 남들이 다 키워놓은 곳(사업)에 무임승차하려 한다면 이 나라 경제는 위기로 갈 수밖에 없다.심 의원은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동차 산업 과잉투자로 큰 실패를 했고, 불법과 탈법을 동원한 경영 승계로 투자의 동력을 소진시켜 온 이 회장이, 이제와 '정신차리자'라고 국민에게 말하면 국민은 정신차려야 할 사람은 오히려 '당신'이라고 하지 않겠냐"라며 "이 회장에게 필요한 것은 '위기론'의 재탕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적인 기업가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