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참사’ 2년…사라진 흔적, 남겨진 기억
[현장포커스] 철거된 '남일당' 가슴아픈 용산, 그곳은 지금…
[매일일보=송병승기자] 2009년 1월. 너무도 추웠던 겨울. 어떤 사람들은 불타오르는 ‘남일당’ 건물을 보며 안타까워했고,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무차별적으로 자행되는 공권력의 진압에 분노했다. 이른바 ‘용산참사’로 잘 알려진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상처로 남았다.
‘용산참사’를 건조하게 팩트만으로 정의하면 2009년 1월20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위치한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점거농성을 벌이던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들, 경찰, 용역 직원들 간의 충돌이 벌어지는 가운데 발생한 화재로 철거민 5명, 경찰특공대 1명 사망, 23명 부상의 피해를 낳은 ‘인명 화재사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어떤 이들에게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흔하디흔하게 벌어지는 ‘일상적 비극’의 한 에피소드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매기는 정글자본주의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기억되고 있다.
2년 후 다시 겨울. 늘 그렇듯 살을 에는 추위는 다시 찾아 왔고, ‘용산참사’를 지켜봤던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2년 전의 그 사건은 잊혀져 가고 있다. <매일일보>은 용산참사 2주기를 맞아 2년 전 그날의 용산과 2년 후 오늘의 용산을 되돌아보았다.
안효상 사회당 대표 “용산 남일당은 우리 사회 양심의 지표…
그 곳이 불길에 휩싸일 때 우리들의 양심도 무너져 내렸다”
장영희 전철연 사무처장 “2년 전 상상만 해도 끔찍해
아직까지 천막 치고 길바닥에서 생활하시는 분들 많다”
# 2009년…용산의 새벽
2009년 1월19일 오전 5시. 용산 4구역 철거민과 전국철거민연합회(이하 전철연) 회원등 약 30여명은 남일당 상가 건물 옥상을 점거 했고, 경찰은 경비 병력으로 3개 중대 300여명을 투입했다.
건물을 점거한 철거민과 점거농성을 해산시키려는 경찰의 대치상황이 사망자까지 나오게 한 ‘화염의 서막’이 될 줄은 이때까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20일 오전 6시. 경찰은 철거민들에게 물대포 살수를 시작했고 이후 건물의 옥상에서 농성하던 철거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컨테이너에 경찰특공대를 태워 옥상으로 올려 보냈다. 오전 7시경 컨테이너가 옥상으로 올라갔고 경찰의 본격적인 진압이 시작됐다. 경찰특공대를 실은 두 번째 크레인이 올라가자 남일당 건물 3층과 5층 사이에서 불이 났다. 이 불길은 옥상에 있던 망루에도 옮겨 붙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이 붙은 망루는 무너졌고 8시 30분경 소방관들은 옥상에 올라가 망루를 해체하였다.
11시 45분경 망루를 수색한 경찰은 사망자 5명을 발견했으며 23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이후 12시경 시신 1구가 추가로 발견됐다.
그들은 왜 망루에 올랐는가
남일당 건물이 속한 용산4구역 재개발 사업은 한강로3가 63~70번지 일대 5만 3442㎡를 토시환경정비 차원에서 재개발하는 사업으로, 40층 규모 주상복합 아파트 6개동이 들어설 계획이었다.
어느 재개발 지역에서나 일어나는 조합과 철거민간의 보상비 갈등 문제가 용산에도 있었다. 서울시와 용산구에 따르면 재개발 조합 측은 세입자에게 법적으로 규정된 휴업보상비 3개월 분과 주거이전비 4개월 분을 지급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일부 세입자는 조합이 주는 보상비로는 생계와 주거를 이어갈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세입자들은 그동안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먹고 살 정도는 됐는데 조합이 주는 보상비는 턱없이 적다면서 당장 철거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드니 대체 상가를 마련하는 등의 대책을 세워달라고 요구했다.
용산 참사 발생 전 세입자 890명중 약 86%의 보상은 완료되었고 철거도 약 80% 가량 이루어 졌지만 삶의 터전을 잃고 턱없이 부족한 보상으로는 아무 곳도 갈 수 없었던 100여명의 세입자들은 2007년부터 ‘생존권, 주거권’ 투쟁을 계속해왔다.
용산을 삶의 터전으로 알았고 그 터전에서 부족하게나마 삶을 유지하던 그들은 자신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남일당 망루에 올랐던 것이다.
# 2011년. 용산의 오늘
‘용산참사’ 2주기를 맞은 2011년 1월17일. 화마에 휩싸였던 남일당 현장에서 ‘용산참사 2주기 범국민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이 열렸다.
106개 단체와 1500여명의 개인 등으로 구성된 범국민추모위원회가 주최한 이날 기자회견에는 여러 정당 관계자와 용산 참사 유가족, 사회 단체 구성원 등 약 100여명이 참여했다.
범국민추모위원회는 ‘용산참사 2주기 범국민 추모주간 사업계획’에서 이번 추모기간이 “끝나지 않은 용산의 문제를 알려내는 장이 되도록 하겠다”며 “용산참사의 또 다른 주요 과제인 재개발제도의 개선을 촉구하고, 제2, 3의 용산이 될 수 있는 철거지역의 강제퇴거 현실을 폭로한다”고 밝혔다.
기자 회견에 참여한 민주노동장 정성희 최고위원은 “용산참사를 잊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하겠다”면서 “참사의 책임자인 이명박 정권을 규탄하고 민주노동당이 국회에서 강제퇴거금지법 제정에 힘 쓰겠다”고 밝혔다. 정 최고위원은 “뒤바뀐 세상에서 시민들의 생존권인 주거권을 쟁취하고 반드시 살인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회당 안효상 대표는 “용산, 남일당은 우리 사회, 양심의 지표였는데 그 곳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 우리들의 양심도 무너져 내렸다”면서 “우리들의 아픈 점을 치유해 나가기 위해 그 양심을 다시 한 번 일깨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 대표는 이어서 “우리는 더 이상 떨어질 곳 없이 나아갈 길 뿐”이라며 “책임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용산참사로 인해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전철연 장영희 사무처장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제2의 용산과 같은 철거 현장에 대해 목소리를 높혔다. 장 사무처장은 “2년 전을 상상하기만 해도 끔찍하다”면서 “아직까지 천막치고 길바닥에서 생활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장 사무처장은 이어서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과 주거권을 쟁취하는 그날까지 투쟁하겠다”면서 “현장에서 잘못된 점을 외치는 한 사람으로 함께 하겠다”고 밝혔다.
범국민추모위원회는 이날 기자회견이 끝난 뒤 ‘또 다른 용산에 연대하자’는 취지로 현재 재개발에 맞서 투쟁을 진행 중인 성남 단대동, 상도4동, 홍대앞 두리반을 방문해 규탄 집회 및 철거현장에서 계속되고 있는 문제점들과 앞으로 해결해 나갈 방안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지역 대학생연합의 일원으로 이번 범국민추모위원회에 참가한 한 학생은 “열악하고 처참한 환경을 느끼기 위해 대학생으로서 참여했다”면서 “사회 계층 간에 연대하는 것이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범국민추모위원회는 17일부터 20일까지의 추모기간동안 기자회견과 개발지역 연대 방문 뿐만 아니라 ‘강제퇴거금지법’ 제정 토론회, 2주기 추모 상영회, 2주기 추모제, 추모 문화제 등을 진행한다.
주차장이 된 남일당 터
많은 사람이 생존권과 주거권을 부르짖으며 올랐던 그 남일당 건물은 이제 사라져, 드나드는 차량만 가득한 주차장이 되어 버렸다. 주변의 건물들도 대부분 철거 되었고 한 쪽에서는 계획한 대로 아파트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용산참사’의 ‘남일당’ 건물은 이제 이전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는 사진들과 관계된 사람들의 가슴속에만 시리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남일당 건물이 있었던 자리 인근 상인들도 ‘용산참사’의 기억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던 듯 말을 아꼈다.
한 식당 아주머니는 용산 참사 이야기를 꺼내자 “바쁘다”면서 자리를 피했고, 주변 건물 관계자도 “말하고 싶지 않다”면서 손사래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