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여성 후계자, ‘거친 남성의 세계가 좋다?’

보령 김은선 부회장, 울트라 강현정 사장 등 남성 영역 점령해

2008-04-07     권민경 기자

제약, 건설, 주류 업계서 섬세함에 추진력 더해 승부
재계, 능력만 있으면 딸도 대권승계 가능 분위기 고조

[138호 경제] 재계에 더 이상 ‘금녀의 벽’이란 말은 통하지 않을 듯하다. 가업을 물려받아 남성들이 점령해왔던 분야에 속속 뛰어들고 있는 여성 후계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보령제약 김은선 부회장과, 울트라 건설 강현정 사장, 배혜정 누륵도가의 배혜정 사장 등이다. 이들은 각각 제약과 건설, 주류 등 그동안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분야에서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어 재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에 남성 못지않은 과감한 추진력과 열정까지 갖추고 있어 회사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업계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딸이든 아들이든 능력 있는 사람을 ‘후계자’ 로 키우고자 하는 최근 재계의 분위기와 맞물려 이들 여성 후계자들의 영역 파괴는 앞으로도 확대될 전망이다.

보령 김은선 부회장, 대권 승계 막바지

지난 1957년 ‘보령약국’에서 시작돼 올해로 창업 50주년을 맞은 보령그룹. 반세기 동안 한국제약 업계를 이끌어 온 보령은 현재 제약업계의 대표적인 여성 CEO인 김은선 부회장이 이끌고 있다. 창업주인 김승호 회장이 아직 ‘회장’직함을 유지하고 있지만 김 부회장은 딸만 넷인 집안의 맏이로서 장자승계원칙처럼 ‘장녀승계’를 할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보령 측에서는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는 입장이지만, 업계에서는 이미 지난해부터 김 부회장의 대권 승계에 관한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특히 올해 그룹 창립 50주년을 맞아 회장직에 오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지분만 놓고 봐도 김 부회장은 이미 실질적 오너라고 볼 수 있다. 김 회장 지분이 0.13%에 불과한 반면, 김 부회장은 8.9%를 보유 1대 주주다. 최종 결재권 또한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사실상 그룹을 이끄는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회장 직함은 여전히 김승호 회장이 갖고 있지만, 최종 결재권은 김은선 부회장에게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카톨릭대 식품영양학과와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거쳐 지난 1982년 보령제약에 입사한 김 부회장은 이후 모든 부서를 두루 거치며 실무 경험을 쌓았고, 2000년 보령제약 회장실 사장을 거쳐 이듬해 부회장으로 취임했다.  현재 보령그룹은 보령, 보령제약 등 제약부문을 비롯해, 유아용품업체인 보령메디앙스, 백신과 제대혈사업을 하고 있는 보령바이오파마, 건강기능식품업체인 보령 수&수, 종합커뮤니케이션 회사 킴즈컴, 정보통신전문회사 BR네트콤 등 7개 계열사로 구성돼 있는데, 각각의 계열사는 전문경영인 체제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김 부회장은 각 계열사의 사업을 큰 틀에서 관장하고, 전문경영인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보령제약의 자회사 보령수&수가 새롭게 시작한 화장품 사업을  진두지휘했다고 알려져 업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김 부회장은 직함이나 그룹 내에서의 입지에 비해 그동안 언론에 노출된 일이 많지 않았다. 보령 관계자는 이것이 김 부회장의 평소 경영 스타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창업주인 김 회장이 세부적인 사업까지 일일이 챙기는 것과 달리 김 부회장은 각 사의 경영은 전문경영인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역할을 조율하는 일에 힘쓰겠다는 것. 때문에 김 부회장 본인보다, 계열사의 전문 경영인들이 언론에 더 부각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그룹의 사업 전반을 거시적으로 관장하고, 컨트롤하는 능력은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한편 김 부회장의 막내동생인 은정(37)씨 역시 언니와 마찬가지로 그룹 경영에 나서 주력 계열사인 보령메디앙스의 부사장을 맡고 있다. 김 부사장은 94년 보령제약에 입사한 뒤 97년 보령메디앙스로 옮겨 그 동안 아이맘사업본부장 패션유통사업본부장 등을 역임해 왔다.

울트라건설 강현정 사장 건설업계 여풍 주도 

유난히 거친 남자들의 세계로 알려져 온 건설업계에도 눈에 띄는 여성 경영인이 있다.  울트라건설 고 강석환 회장과 부인 박경자 현 회장의 1남3녀 중 차녀인 강현정(35) 사장이 그 주인공. 울트라건설은 울트라콘을 운영하던 재미교포 사업가였던 강 전 회장이 유원건설을 인수하며 사명을 바꾼 회사로 건설업계 시공능력순위 63위의 건실한 중견업체다. 강 전 회장이 한국으로 돌아와 울트라건설을 운영하는 동안, 강 사장은 미국 인디애나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울트라콘 지사장으로 근무하며 경영수업을 받았다. 그 뒤 지난 2003년 강 전 회장 작고 이후 울트라 울트라건설에 입사해 기획조정실장 등을 지낸 뒤 2005년 부사장에 올랐고, 올해 초 대표이사를 맡았다. 현재 박 회장은 중요한 안건에 대해서만 결재를 하고, 회사의 실질적인 경영은 강 사장이 총괄하고 있다. 남성 고유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건설업계에 30대 미혼의 젊은 여 사장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것에 업계는 많은 관심을 보내고 있다. 특히 울트라건설은 아파트 등 주택분야보다 도로, 철도, 교량, 터널공사 등의 시공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강 사장의 거침없는 행보는 더욱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관심을 받는 만큼 지금까지 강 사장은 경영 능력에 있어서도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다. 2004년 힘든 시기를 겪었던 울트라건설의 경영 정상화에 일조했고, 부사장에 취임한 첫 해인 2005년에는 울트라건설이 사상 최대 흑자를 달성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같은 해 4월에는 한국도로공사로부터 통영~진주간 제23공구 건설과 관련해 우수 건설업자로 선정되는 기쁨도 누렸다. 도로공사의 우수건설업자 선정은 한 해 동안 준공된 건설공사를 대상으로 시공평가 및 시공능력평가를 실시해 상위 점수를 얻은 건설업자에게 시상하는 것으로, 선정절차 등이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다. 지난해에는 2대 주주인 삼광기업이 지분을 늘리고 경영참여를 선언하면서 업계에서 M&A 설이 불거지기도 했지만, 매각 우려를 일축하고 내실 다지기에 힘을 쏟았다. 이처럼 강 사장이 울트라건설의 경영을 주도하면서 활약을 보임에 따라 회사 내에서도 그에 대한 신임이 두터운 상황. 울트라건설 한 관계자는 “강 사장은 미국 울트라콘에서 근무하면서 쌓은 탄탄한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또 강 사장을 ‘괄괄하다’는 한 단어로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여성다운 섬세함과 부드러움을 갖췄지만, 건설사를 책임지는 CEO답게 웬만한 남성 경영인보다 스케일이 크고, 활동적인 면이 강하다는 얘기.한편, 강 회장은 올해 울트라건설의 해외진출에 역량을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지난 1984년 해외건설 수출 10억불탑 수상을 시작으로 중동, 러시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등에서 토목, 건축, 플랜트 등 수많은 공사를 수행한 울트라건설의 저력을 바탕으로 올해 카타르, 말레이시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관계자들이 나가 주변 환경 등을 파악하고 있다.이뿐 아니라 지난해부터는 주택 부문을 강화해 토목 위주였던 사업 구조를 다각화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이 분야에 적극 나서고 있다. 현재 울산화봉지구 아파트 건설을 진행 중이고 내년 9월 준공을 앞두고 있다. 서수원 참누리 아파트, 판교 주공 7공구 건설, 경남 밀양 양산 주공 아파트 건설 또한 진행 중에 있어 오는 2009년에 각각 준공 예정이다.

배혜정 사장, 자신의 이름 딴 회사로 독립

주류업계 여성CEO 1호인 배혜정 누룩도가의 배혜정(52) 사장은 김 부회장, 강 사장의 경우와는 조금 다른 케이스. 국내 전통 주류업체인 국순당 창업주 배상면 회장의 차녀인 배혜정 사장은 지난 2002년 자신의 이름을 딴 막걸리 회사 ‘배혜정 누륵도가’를 만들어 독립했다.배 사장은 위로 오빠인 배중호 사장과 아래로 배영호 사장을 두고 있다. 배중호 사장은 지난 95년 배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며 국순당 경영을 물려받았고, 배영호 사장은 산사춘으로 유명한 전통주 제조업체 ‘배상면주가’를 만들어 독립했다.어린 시절부터 집안 가득히 베어있던 술과 누룩의 향기, 또 연구에 몰두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술’과는 운명적인(?) 관계였다고 말하는 배 사장은 특히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을 하게 된 동기 역시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만큼 전통술의 연구, 개발에 힘써온 배 회장에 대한 존경심이 크다.그러나 배 사장은 창업에 나설 당시 아버지로부터 어떠한 물질적인 지원도 받은 것이 없다. 자신의 종자돈과 은행 대출로 사업을 시작했고, 배 회장으로부터는 고급 막걸리에 대한 기술 개발 지원만 있었을 뿐이다. ‘생존 해법은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는 것이 배 회장의 확고한 교육관이었기 때문에 배 사장 역시 여성으로서는 쉽지 않은 주류업계에 뛰어들어 홀로 고군분투를 시작했던 것.   배 사장은 우리나라 토양에 가장 적합하고, 환경 친화적이면서 건강기능성이 뛰어난 우리 술을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이렇게 해서 알콜도수 16도의 원주 ‘부자’와 쌀과 포도를 재료로 하는 한국식 와인 ‘새색시’가 탄생했다. 아직까지 전통주 시장에서 배 사장의 작품들이 큰 호응을 얻고 있지는 못하다. 부자의 경우는 출시 초기 배 회장의 외동딸이 내놓은 술이라는 이유 덕분에 반짝 반응을 보였지만 얼마 못가 반품이 쏟아지고, 대리점이 문을 닫는 등 국내 시장에서 위기를 맞았다. 이에 배 사장은 대리점 영업을 접고 직판에 나서 고급 음식적과 골프장, 호텔 등에 직판을 통해 자신의 술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일본 관광객의 입맛을 사로잡아 일본 시장으로의 수출을 열었고, 일본 내 5곳의 업체와 판매계약을 맺기도 했다.배 사장은 앞으로도 한국 전통 막걸리를 복원하고, 고급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 개발에 전념한다는 각오다. 이런 이유 탓에 “너무 바빠 언론에 나설 시간조차 없다”고 회사 관계자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