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노역 피해자 ‘99엔’ 논란 재점화
당시 소 2마리 값, 지금은 라면 2봉지 값…“일본정부, 장난하나?”
2011-02-26 한승진 기자
12~16세 어린나이에 일본 군수업체에 끌려가 혹사한 대가로 99엔 지급을 결정한 일본 정부에 항의하는 시민단체들은 10만 릴레이 운동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겠다며 각오를 다지고 있다.
경남 창원여성회와 최미니 창원시의원은 28일 오후 2시 창원대에서 '근로정신대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사례발표회'를 연다.
이 자리에서 근로정신대에 억울하게 끌려간 마산 김수자(81) 할머니가 '근로정신대를 가게 된 과정과 당시상황', 광주 양금덕(82) 할머니는 '귀국후 나의 삶'에 대해 증언한다.
김 할머니는 1944년 마산성호초등 재학 중 후지코시군수업체에 동원됐다. 지금은 12년째 일본정부와 기업을 대상으로 법정소송 중이다. 양 할머니는 초등6년 미쓰비시군수업체에서 강제노역 당했다. 일본을 오가며 미쓰비시기업과 손해배상 협상을 진행 중이다.
1944년 아버지는 징용을 가고,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난 당시 초등6년 담임선생님의 '일본가면 학교에 갈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조선여자근로정신대로 일본길에 오른다. 이듬해 여동생도 '일본가면 언니를 볼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일본길을 뒤따랐다.
감금 상태나 다름 없는 공장에서 그들은 기계부품과 다름 아니었다. 먹을 것 조차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물로 헛배를 채우기 일쑤였다. 1944년 2월7일 나고야에 닥친 지진으로 6명의 조선 소녀들은 건물더미에 깔려 목숨을 잃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모든 것은 '거짓'이었다.
'일본 갔다온 여자'로 살아온 60여년,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을 기다린 것은 위안이 아닌 사회의 냉대와 따돌림 뿐이었다.
이후 할머니 곁을 지켜온 사람은 한국인이 아닌 일본나고야의 양심적 시민들이었다. 장장 10년의 소송을 함께하며 투쟁을 만들어온 이들은 지금도 '금요행동'이라는 이름으로 도쿄의 한 거리를 지키고 있다. 국적을 초월한 이들은 '나고야 소송 지원회' 회원들이다.
◇후생연금 99엔 사건
강제징용된 한국인의 후생연금보험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2년 '노동자연금보험'으로 시작됐다. 국적 구별없이 일본의 탄광이나 군수공장 등에 종사하던 근로자들이 급료에서 공제하는 형태로 가입했던 보험이다. 일정기간 보험금을 납부하면 퇴직 후에도 연금을 받을 수 있으며 중도에 일을 그만둘 경우 탈퇴수당을 받도록 돼 있다.
한국인 징용자들은 이런 보험이 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른채 강제 노역에 종사하다 종전후 서둘러 귀국했다. 보험금 청구를 할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연금탈퇴 수당도 받지 못한채 고국으로 귀환했다.
한국인 징용자의 연금 가입 사실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 징용돼 히로시마 군수공장인 미쓰비시중공업에서 일하다 1945년 8월 피폭(원자탄 폭격 피해)돼 한국으로 귀국했던 이근목(86)씨와 김민경(86)씨가 피폭자 인정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일본 사회보험청은 65년이 지난 2009년 현재 보험가입 기록이 확인된 한국인에게 현행 후생연금보험법상 당시 화폐가치만으로 보험 탈퇴수당을 지급하도록 돼 있다며 양금덕 할머니 등에게 99엔(1300원)을 지급한다고 통보했다.
99엔은 당시 소 두마리에 해당하는 금액이고, 이미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8억 달러)으로 청산했다는 바탕을 깔고 있다.
당연히 당사자들은 수령을 거부하고 시민단체들도 라면 두봉지 값에 불과한 무시하는 처사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2004년 설치된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에 보상금을 받기 위해 연금기록 확인을 요청한 피해 당사자와 가족은 16만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한국 정부는 우선 4만명의 연금기록 확인을 일본에 요청했고, 이중 4727명의 기록이 확인됐다.
◇광주에서 시민운동 활발
2009년 2월 시민 20명이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을 결성했다. 특히 2009년 9월25일 광주 한 복판에 강제징용자들을 가장 많이 혹사시킨 미쓰비시중공업이 자동차전시장 문을 열자 시민운동 불길이 가열됐다.
미쓰비시 광주전시장 앞에서 근로정신대 문제해결을 촉구하며 1인 시위를 시작하자 호응하는 시민이 급속히 늘어났다. 혹한의 눈보라, 장대 같은 빗속, 찌는 듯한 폭염과 맞서며 1인 시위는 208일 동안 이어졌다.
여기다 국민들의 귀를 의심케 한 '99엔' 사건에 반발한 민심은 서명운동으로 표출됐다. 강원도 어느 산골학교, 해남 땅 끝 어느 교회, 경남의 어느 시민, 제주도 등 각지 13만4162명이 서명에 동참했다.
미쓰비시 광주전시장은 2010년 11월 판매여건이 악화되자 철수했다.
시민단체들은 일본 후생연금 탈퇴수당금 99엔 문제를 한일 과거사 중 가장 상징적 사건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는 과거사 문제해결의 시험대라며 99엔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과거사 문제 그 어떤 것도 풀리지 않는다고 단정했다.
2010년 7월14일 미쓰비시가 주총에서 '협의 수용'을 표명했다며 2011년 6월 중순 열릴 주총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10만 희망 릴레이는 결정적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
근로정신대 문제는 결과와 무관하게 한일 양국 시민들의 지난한 투쟁을 통해 역사청산의 한 단초를 마련한 각별한 의미가 있고, 10만 희망릴레이는 시민들과 오랜 투쟁에 종지부를 찍고자 한다며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란?
태평양전쟁의 말기인 1944~1945년 사이에 초등 6학년에 재학 중이거나 13~16세의 어린나이를 악용,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시켜준다고 회유해 강제동원한 뒤 후지코시, 미쓰비시중공업 등 군수회사에 강제노역 당한 피해자를 말한다.
이들은 해방을 맞을 때까지 굶주림과 감시속에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으나, 해방 65년이 되도록 임금은 물론 그 어떠한 사죄나 배상도 받아내지 못했다.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왔지만 군 위안부나 몸 버린 여자라는 사회적 편견과 오인으로 인해 파혼의 아픔을 경험하거나 아직도 주위에 차가운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등, 이중의 고통을 겪어 왔다.
그동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국제적 관심에 비해,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는 사회적 관심은커녕 그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지난 2007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183명(생존 161명)이 접수했다. 실제 1700여 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일제에 강제징용된 한국인은 총 70만명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