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시간이 멈춰버린 젊음의 공간 ‘인천 도화동’

아직 끝나지 않은 인천시 '도화동 잔혹사'

2011-03-18     송병승 기자

[매일일보=송병승기자] 벌써 5년째다. 2006년 10월부터 인천시와 도시개발공사의 ‘도화도시개발사업’에 맞서 도화동 철거민들이 주거생존권 보장 투쟁을 벌인지도 어느덧 다섯 해가 바뀌었지만 변한 건 없다. 2009년의 용산이 그러했듯이 이곳 인천 도화 재개발 지역 역시 철거민들이 하나 둘 쫓겨나고 건물이 헐리면서 폐허로 변해 사람이 살기 섬뜩한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다.

한때 인천대학교와 인천전문대학교의 상권 아래 놓여 풍요를 이루었지만 대책 없는 개발사업과 인천대학교의 송도 이전으로 이제는 흉흉함만이 감도는 인천 도화지구 현장을 찾았다.

잔인한 인천시, 대부료 매길 땐 60평, 보상금 매길 땐 33평
대부료 8년 밀리니 남은 보상금은 900만원…죽으라는 소리?

“아파트 짓는다고 다 쫓아냈는데 인천대 리모델링한다니 사람들 난리”
잇따른 화재에 ‘남은 사람 쫓아내려고 일부러 불낸다’는 소문까지 돌아

인천시 남구 도화동 일대의 중심에는 원래 인천대학교와 인천전문대학교가 있었다. 2개 대학교 학생들로 인해 형성된 상권으로 도화동 일대는 활기가 넘쳤고 그래도 꽤 살만한 곳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2006년 4월 도화동 일대가 '도화도시개발구역'으로 선정되고 인천대학교가 송도신도시로 캠퍼스 이전을 발표하면서 도화동 일대에는 혼란이 찾아 왔다.

더불어 2009년 9월 인천대학교가 송도신도시로 이전함과 동시에 인천전문대학교와의 통합이 결정되면서 도화동에 남아있던 나머지 학생들마저 모두 떠났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던 상인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식당도, 당구장도, PC방도 학생들이 떠나니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자기 땅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수용할 만한 선의 보상금을 받고 자리를 비웠다. 하지만 무허가 지역에서 살고 있던 세입자들은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한때 1800여 세대에 달하는 사람들이 살던 도화동 일대는 현재 약 200여세대만 남아 있다. 거주민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언제든지 쫓아 낼 수 있는 상황이다.

“그래도 살만 했었는데…”

박영희(가명. 61)씨는 1984년에 도화동으로 터전을 옮겼다. 당시 돈 200만원으로 방 하나 부엌 하나인 집을 샀다. 집 주변은 대부분 밭이었다.

박씨와 남편은 그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주변의 밭을 조금씩 키워서 집으로 만들었다. 그야말로 손수 만든 삶의 터전이었다.

“우리집 애들이 네 명이에요. 다 여기서 키우고 모두 출가시켰지. 여기서 애 키우니라고 참 힘들었었는데…”

인근에 인천대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동네는 활기가 넘쳤다. 많은 사람들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상가를 운영했고 자기 집이 있는 사람들은 하숙을 했다.

학생들이 있었기에 동네에는 항상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새 학기가 되면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했고 동네 주민들의 생계도 그럭저럭 유지 할 수 있었다.

박씨가 도화동에 터전을 잡은 지도 20년이 훌쩍 지났다.

그 사이에 사유지였던 도화동 일대가 1998년 인천 시유지로 변경되었다. 예전 집주인이 재산을 압류당하면서 그렇게 됐다고 한다.

인천대학교는 무허가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공유재산 대부료(변상금)을 매겼다.

박씨가 조금씩 가세를 넓힌 집의 면적이 60평에 해당한다며 시립 인천대학교 측은 1998년부터 매년 5백만원의 대부료를 부과했다. 다달이 내야하는 돈이 41만6천원이 넘었기 때문에 박씨 가족으로서는 도저히 낼 수가 없었다.

2006년에 재개발이 결정되었다. 당연히 박씨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기 거주에 따른 점유권을 인정받아 받게 되는 보상금을 책정한다고 시에서 사람이 나왔다.

그들은 박씨의 집을 ‘지장물’이라고 불렀다. ‘지장물’이란 부동산을 개발하는데 지장을 주는 물건이라는 뜻으로, 무허가 주택 등을 일컫는 부동산 용어이다.

지장물 조사에서 박씨의 집에 대한 보상금은 5000만원 정도가 매겨졌다. 대부료를 책정할 때 기준이었던 60평이 아니라 실측결과 나온 33평에 해당하는 보상금이었다.

8년 간 내지 못하고 밀려있었던 대부료가 4000만원이었다. 그리고 이 돈을 빼고 박씨가 받을 수 있는 돈은 단돈 900만원이었다. 이 돈으로는 아무 곳도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인천시를 향해 과다 책정되었던 대부료를 깎아달라는 말은 엄두도 내지 못했던 박씨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한다.

“여기 아니었으면 어디다 집이라도 샀을지 몰라. 그냥 여기 믿고 있었는데, 생전 살라고 그랬는데 강제로 내 쫓는 거지 뭐…이제는 진짜 난감해, 나이는 먹어 어떻게 할 수는 없지…”

“이북 사람들도 살게 해주는데…”

재개발이 결정되고 난 후 박씨의 집에 도둑이 두 번이나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7월에는 화재가 발생해 박씨의 집은 모두 타버렸다.

다행히 창고로 쓰던 공간이 남아 있어 현재 박씨와 남편은 그곳에 살고 있다. 6평 남짓한 이 공간에는 화장실도, 씻을 곳도 없다.

지금 있는 살림살이도 이사 가는 사람들이 버리고 간 물건들을 주워다 놓은 것이다. 그는 집이 다 타고 겨우 목숨만 살았는데, 그 목숨이 살아서 이렇게 고통을 받는다고 하소연했다.

“여기 살던 사람들 정부에서 나오는 세금 그런 거 다 내고 살았던 사람들이야. 그런데 잘 살고 있던 집을 이렇게 나락으로 몰아가서야 되겠어. 살게끔 해줘야지. 심지어 이북 사람들도 넘어오면 살게끔 해주는데 대한민국에서 평생 살던 우리들은 죽으라는 건지…”

현재 박씨는 자녀들이 보내주는 생활비와 남편이 가끔씩 나가 벌어오는 날일 품삯으로 근근이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연쇄 방화 배후가 인천시?

거리를 가득 메우던 학생들이 떠나고 그 뒤를 이어 대부분의 주민들도 떠난 도화동 일대에는 나부끼는 ‘철거 반대’ 깃발만이 그곳이 재개발 대상지역임을 알게 해주고 있다.

한때 인천대학교 교직원 숙소로 제공됐다는 5층짜리 건물은 유리창이 깨지고 페인트가 벗겨진 채 덩그러니 남아 있었고, 주인이 떠난 상가 건물과 집들은 쌓여있는 먼지와 거미줄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재개발 대상 지역에 속하지 않은 인근 상권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도화오거리 일대 많은 영세 상가들은 철제문을 내린 상태였다.

도화 지역에서만 10년 동안 커피숍을 해 왔다는 상인은 “대학교 있을 때는 그나마 먹고 살만 했는데 이제는 영 시원치 않다”며 “인천대를 폭파하고 아파트 건설한다고 살던 사람들 다 쫓아냈는데 지금은 인천대를 리모델링해서 다시 사용한다고 하니 사람들이 난리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서 “여긴 (공사장을) 벌려놓기만 했지 진행된 것은 하나도 없다. 말로만 금방금방 된다는데 언제 될지 모른다”며 “이게 다 인천시가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나름의 해석을 덧붙였다.  

도화 재개발 지역에 몇 세대의 집이 남지 않자 그 지역에는 ‘방화범이 일부러 불을 놓고 다닌다’는 소문마저 돌고 있다. 인근 주민의 말에 따르면 지난해 한 해 동안만 박씨의 집을 포함해 재개발 대상지역에서만  3건의 화재가 발생했다.

재개발 대상지역에 살고 있는 최금자(가명.73)씨는 “남아 있는 주민들을 내쫓기 위해 일부러 불을 놓고 다닌다는 소리가 들린다”며 “사람이 아주 살지 않으면  상관없지만 남아 있는 집들이 있어 자다가도 타는 냄새가 나면 일어나 마을을 둘러본다”고 말했다.

어스름이 내려앉자 도화동 일대에는 을씨년스러운 기운마저 감돌았다. 대부분의 집에 전등이 켜지지 않아 많은 집들이 이미 그곳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돌아오는 길. 한때 젊음이 넘쳤다는 도화동의 모습은 이제 찾아 볼 수 없었다. 인천시와 도시개발공사, 그리고 인천대학교의 대책 없는 막개발로 인해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철거대상자가 되어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남아있다.  


 

“우린 럭비공, 어디로 튈지 모른다”

17일 ‘도화지구 철거민 생존권 보장 요구’ 집회 풍경

지난 17일 인천 남구 도화동 도화사거리에서는 ‘도화지구 철거민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제목의 집중 집회가 열렸다.

매우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날 집중 집회에는 도화철거대책위원회, 다른 지역 철대위, 전국철거민연합,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 빈곤사회연대 등의 많은 단체에서 약 200여명이 참가했다.

집중집회 대회사를 맡은 도화지구철거대책위원회(이하 도화 철대위) 박승우 위원장은 “쌀쌀한 날씨 속에 참여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며 “주거생존권에 대해 ‘선 대책 후 철거’에 관련한 발언은 오늘 하지 않겠다”는 말로 이날 집회를 시작했다.

박승우 위원장은 “현재 인천 남구청에 민원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철거반대 플래카드가 보기 싫다는 민원이라고 한다”며, “도화동 쪽방에 사는 사람들과 소상공인들도 다 세금을 내는 사람들”이라며 “이들이 진정한 민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목소리를 높혔다.

박 위원장은 더불어 “공무원 나리들. 럭비공이 어디로 튈지 모르듯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라며 “우리는 튈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젠 행동으로 보여주겠다”고 선언했다.

전국철거민연합(이하 전철연) 장영희 의장은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다”며 승리를 다짐했다. 장영희 의장은 “가진 것 없고 기댈 것 없는 우리들은 지난 겨울을 칼바람 속에서 지냈다”며 “이제 날은 조금 따듯해졌지만 우리들의 가슴 속에서는 아직 날 선 바람이 불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장 의장은 “우리는 이명박 정권이 용산참사로 고귀한 사람들의 목숨을 가져간 것을 보았다”며 “그때 본 많은 것들을 한 순간도 잊지 말고 기억해 생존권 쟁취 투쟁을 승리로 이끌자”고 덧붙였다.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이원호 위원은 송영길 인천시장의 무책임함을 꼬집었다.

이원호 위원은 “용산참사 민주당 특위 위원장이었던 사람이 송영길 현 인천시장”이라며 “그가 했던 용산참사 특위가 열사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마음으로 했던 것인지 정치적 이득을 챙기고자 했던 것인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위원은 “송 시장의 진심이 무엇인지는 인천지역 철거민들의 주거권과 생존권 문제로 드러날 것”이라며 “이렇게 철거민들이 길거리에서 외칠 수밖에 없게 하는 행태 자체가 어떤 심정으로 (민주당 용산참사 특위위원장을)했는지를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도화지구)개발이 종합적인 계획을 가지고 했던 것이 아니라 전임 시장이 치적을 쌓기 위해서 한 것”이라며 “이러한 개발의 족쇄를 끊는 것은 투쟁과 연대”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