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이야~ "상무자리 하나 줘~"
재벌3,4세들 ‘고속’도 모자라 ‘광속’ 승진 눈길
2008-05-24 권민경 기자
[145호 경제] 10대 미성년자가 수억대의 주식부자라거나, 갓 대학을 졸업하고 굴지의 대기업에 임원급으로 입사한다거나, 분명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국내 재계를 움직이는 재벌그룹의 오너일가쯤은 돼야 가능한 일.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황태자들이기에 일반인과 다를 것이라고 한 발 물러선다 해도, 갈수록 취업난이 극심해지고 밤낮으로 회사에 몸 바쳐 충성해도 언제 퇴출될지 모르는 상황에 놓인 샐러리맨들 입장에서야 재벌들의 이런 행태가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재벌그룹들은 이에 아랑곳없이 갈수록 ‘황태자’만들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지난 몇 년 사이 심해져 재벌 3,4세 가운데는 30대 초반에 이미 그룹 경영권을 넘겨받고 황태자에서 황제 격으로 오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20대 중반의 나이로 입사할때부터 임원급으로 들어와 초고속승진을 거듭하는 경우도 상당수다.
장면1- 회사들이 밀집해있는 서울 한 중심가의 퇴근 무렵 지하철 역. A그룹 사원증을 목에 걸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이 눈에 띈다. 지하철 가판대에 걸린 신문 내용을 훏어보다 A그룹 오너의 20대 아들이 ‘그룹 지분 매입을 늘려가고 있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두고 설전이 벌어졌다.
“우리는 이제 저쪽 비유를 맞춰야 되는 건가?”
“나야 우리 아버지 아들이고, 쟤야 회장님 아드님이신데...알아서 줄 서는 수밖에 방법이 있나”
능력검증도 없이 입사하자마자 ‘오너’ 대접~
기업마다 ‘경제 위기’를 외치며 경영 고삐를 바짝 쥐고 있는 상황에서 회사에 몸담고 있는 직원들은 이처럼 맡은 바 업무 외에도 회장님 아들, 딸들을 신경써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국내 재벌기업의 오너 3.4세들의 후계승계 속도가 점차 빨라지면서 이들이 단번에 임원급 자리를 꿰차고 있기 때문.입사는 과장급, 1년만 지나면 자연히 임원 올라
대한항공의 라이벌격인 금호아시아나그룹 역시 후계 승계에 잰걸음 중인 것은 마찬가지. 박삼구 그룹 회장의 외아들인 박세창씨(32)는 지난해 금호타이어 기획부장에서 그룹 전략경영본부 이사로 초고속 승진했다. 박 이사 역시 입사한 지 불과 1년 만에 임원으로 올라선 케이스. 당시 금호 측 관계자는 박 이사의 승진 배경과 관련해 ‘능력이 있어서’라고 강조했지만, 업계의 시각은 ‘능력’과 상관없이 박 회장의 후계자로서 승계 작업의 일환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런가하면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의 장녀인 정지이(30) 현대유엔아이 전무 또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고 있는 재벌3세 가운데 하나다. 정 전무는 부친인 고 정몽헌 회장 사후 2004년 현대상선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이례적으로 눈길을 끌었는데 그해 말 곧 대리로 승진, 이듬해 7월에는 과장으로 승진했다. 2006년 3월에는 그룹 IT계열사인 현대유엔아이 기획실장으로 한 단계 올라섰고, 9개월 뒤 다시 전무로 승진하며 후계 승계에 바짝 다가섰다. 이밖에도 기아차 정의선(37) 사장, 현대백화점 정지선(35) 부회장 등은 30대 중반의 나이에 이미 그룹 경영을 책임지는 총수 자리를 맡고 있다.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의 세 아들인 현준(39), 현문(38), 현상(36)씨 역시 각각 그룹 사장과 부사장, 전무에 올라 이미 승계 작업을 마무리 지은 바 있다.이처럼 재벌3.4세들의 조기 경영권 승계가 ‘붐’을 이루고 있는 현상에 대해 재계 일각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이렇다 할 실무 경험도 없으면서 오너 일가라는 이유만으로 초고속 승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 더욱이 과거 일부 재벌그룹들에서는 젊은 후계자들이 경영전면에 나서 대규모 사업을 벌이다 실패해 그룹에 적지 않은 피해를 준 사실도 있어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은 최근 “재벌 3~4세들이 경영을 못한다면 주주들이 그만두게 하는 것이 옳지만 현재 상황은 그렇게 되고 있다 않다”며 “재벌 3~4세의 경영능력에 대한 걱정을 왜 국민이 해야 히느냐”고 쓴소리를 날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