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거짓말·계급주의…신라호텔, ‘공공의 적’ 되다

뷔페식당 출입 예약 고객에 ‘한복 금지령’ 파문 일파만파

2012-04-15     김경탁 기자
[매일일보=김경탁·송병승 기자] 신라호텔이 ‘한복’ 때문에 뭇매를 맞고 있다. 호텔 뷔페식당인 파크뷰에서 한복을 입은 사람에 대해 출입 제한을 둔 사실이 트위터를 통해 알려지면서 2시간여 만에 출입 제한을 변경하고 이튿날 이부진 사장이 직접 당사자를 찾아가 사과했지만 사태는 일파만파 확산됐다.정치권과 정부까지 나서서 신라호텔의 행태에 대해 엄중조치하겠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는 가운데 과거 자위대 창설기념식 등 신라호텔에서 열린 일본 관련 행사에 기모노 차림의 여성들이 출입했던 사진이 주요 포털에 퍼지면서 전국민적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한복 디자이너 이혜순 “전통의상인데 왜 못들어가” 항의
신라호텔 측 “치마폭 퍼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위험”

“작년부터 제한” 해명도 거짓…2009년에도 제한 사례 확인
신라호텔에게 ‘왕’은 손님이 아닌 이건희 회장 일가족들 뿐?

12일 오후 9시께 트위터에 ‘지인이 한복을 입고 신라호텔에 갔다가 입장을 제지당했다’는 글이 올라 왔다.“늘 단아한 한복 차림으로 우리 옷의 아름다움을 전파하는 담연 선생이 신라호텔 파크뷰에서 한복입장을 거절당했답니다, 지배인에게 물으니 한복이 위험한 옷이라서 추리닝과 함께 입장 불가하답니다”라는 내용이었다.트위터에서 언급된 ‘담연 선생’은 20여년째 세계에 한복 알리기 활동을 해온 디자이너 이혜순씨로, 그의 호를 딴 한복전문 브랜드 ‘담연’의 대표이사이다.이씨는 한복의 아름다움이 두드러진 영화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의 의상을 제작하고 고려말을 배경으로 한 영화 <쌍화점>으로 대종상영화제 의상상을 받은 바 있으며, 신라호텔의 주인인 삼성가 사람들의 한복을 디자인한 적도 있다고 한다.이날 이혜순씨는 개인적인 모임 때문에 6시 40분께 신라호텔 파크뷰에 도착해 입장을 하려는데 입구에서 지배인으로부터 ‘드레스코드’를 운운하며 “한복을 입으셔서 안 되는데 오늘은 들어가시고 다음부터는 한복을 입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얇은 비단 옷감으로 지은 우윳빛 저고리와 청보랏빛 치마를 입고 있던 이씨는 신라호텔 총 지배인을 만나 부당함을 설명하려 했으나 총 지배인이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 때문에 그날 당직지배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전통의상인 한복이 왜 들어갈 수 없느냐”는 항의에 돌아온 대답은 “치마폭이 퍼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씨는 “한복이 철사로 만들어진 것이냐. 밟으면 눌린다”며, “대한민국 사람이 한복을 입고 들어 갈 수 없는 곳은 상상 할 수 없다”고 항변한 후 신라호텔 더 파크뷰에 들어가지 않고 돌아왔다고 밝혔다.

‘거짓말’이 사건 더 키웠다

이 일이 트위터 상에 알려지자 많은 사용자들은 이 글을 리트윗하며 신라호텔 파크뷰의 한복 입장 제제 조치를 알리기 시작했다. 트위터 사용자들은 “완전 어의가 없다”, “한복에 무슨 폭탄이 달려 있는것도 아닌데 뭐가 위험하다는 건지”, “나라 망신이다” 등의 리트윗 멘트를 달며 신라호텔에 대해 비판했다.

트위터 상에서 비판이 거세지자 신라호텔 파크뷰 총 지배인은 같은날 오후 9시경 이씨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본인은 몰랐다. 죄송하다”면서 “한복 제제 조치를 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이야기가 다시 트위터를 통해 전해졌다.

그러나 이는 거짓말이었던 것으로 곧바로 드러났다. 이씨는 사건을 최초 보도한 <위키트리>에 전화를 걸어 “신라호텔의 거짓말에 어이가 없다. 트위터에서 내 얘기로 문제가 커지니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그는 “신라호텔의 거짓말에 놀랍다. 믿을 수 없다. 대표이사의 입장을 들어야 된다. 신라호텔을 용서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13일 오전 문제가 커지자 신라호텔측은 이씨에게 계속 전화를 했으나 전화를 받지 않자, 이씨의 지인까지 동원해 전화를 해서 “이부진 대표이사에게까지 보고가 됐으니 이해해달라”는 요지의 입장을 전달했다고 한다.이씨는 “사과를 받아들이려 했으나 거짓말까지 한 것을 보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여러 매체에서 관련기사가 쏟아지고, 주요 포털에 실시간 이슈검색어로 이 사건이 오르락내리기 시작한 뒤에서야 신라호텔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직접 이혜순씨를 찾아가 사과의 말을 전하는 한편 공식 해명자료를 발표하면서 사태 수습에 나섰다.이부진 사장은 13일 오전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이혜순 디자이너의 한복숍 담연을 직접 찾아가 “민망해서 고개를 못 들겠다. 죄송하다”고 사과했다고 한다.이 사장의 사과에 대해 이혜순씨는 “개인적으로는 용서하지만 신라호텔의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에는 실망을 금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날 방송 인터뷰에서도 이씨는 “화가 난게 아니라 황당했다”며 “수치스럽고 제 개인적으로도 창피한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이날 신라호텔은 “호텔신라는 뷔페식당 파크뷰에서 최근(12일 저녁) 발생한 한복을 입고 식당에 입장하려는 고객분께 물의를 일으킨 점에 대해 정중히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고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사과문에서 신라호텔 측은 “지난해부터 한복을 착용하고 입장하는 고객 분들께, 고객께서 음식을 직접 가져다 드셔야 하는 뷔페의 특성으로 인해 식당 내 고객들 간의 접촉이 많음을 충분히 설명하고 고객분들께 일일이 안내를 해주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해명했다.“이러한 조치는 다른 고객께서 한복을 착용한 고객의 옷에 걸려 넘어지거나, 한복을 입은 고객이 다른 고객에게 옷이 밟히는 등으로 인해 고객들간의 불만사항이 발생하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다는 것이다.신라호텔은 “이번 일은 이러한 고객 간의 불편함 및 분쟁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식당 입장 전에 한복을 입은 고객 분들께 관련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드리도록 했으나, 식당 근무 직원의 착오로 미숙하게 고객에게 안내되었다”고 실무직원에게 책임을 돌렸다.한편 이번 사건이 일파만파 확산된 배경에는 신라호텔 측의 거짓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건 당일 ‘사과입장을 전달했다’는 거짓해명 뿐이 아니었다. 이튿날 신라호텔 파크뷰 측에서는 “드레스코드 제한은 원래 없었다”는 입장을 강변했다. 한복은 물론, 츄리닝도 무방하다는 것이었다.

신라호텔 홍보팀 관계자는 한복 출입 제지 사실이 벌어진 것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부페식당이다보니 개인이 서빙을 해야 하는데 서빙시 손님들끼리 접촉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고객님께 안내를 드린 것인데 당시 지배인이 미숙하게 응대를 한 것 같다”고 주장했다.

‘왕’은 따로 있다

그러나 신라호텔의 드레스코드 제한은 최소한 2009년 10월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신라호텔 측이 발표한 공개사과문에 등장하는 ‘지난해(2010년)부터’라는 말도 거짓말이었다는 것이다.

‘지니’라는 아이디의 한 네티즌은 2009년 10월9일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친구가 시어머니 칠순잔치를 위해 신라호텔에 뷔페를 예약했는데, 호텔 측에 ‘부모님의 칠순 행사’라고 하니 ‘한복은 누구든 절대 입지 말라’는 요구가 있었다”고 밝혔다.‘지니’는 “호텔 측에서는 한복을 입으면 다른 손님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꼭 한복은 입지 말라며 당부를 했단다, 어떤 행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식사만 하는 것인데도 말이다”라며, “특별한 날 왜 한복을 입지 못하게 하는지 울컥하더라”고 전했다.고객의 칠순잔치에 대해서는 ‘한복 금지령’을 내렸던 신라호텔에서 지난 1월9일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의 칠순 잔치가 열렸다. 이날 이건희 회장의 아내인 홍라희씨가 입은 옷은 노란빛의 한복이었다. 물론 치마폭 역시 펄럭일 정도로 넓었다.

삼성그룹 계열사인 신라호텔에게 있어 ‘왕’은 고객이 아니라 이건희 회장 일가족이라는 해석을 붙일 수밖에 없는 일화이다.호텔을 이용하는 일반 고객에게 금지된 삼성그룹 총수 일사인 홍라희씨에게만 한복이 허용됐다는 사실보다 네티즌들이 더욱 분통을 터뜨린 것은 신라호텔이 사실상 일본 옷인 기모노에 대해서는 제한을 두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정황들 때문이다.주요 포털사이트에는 2004년 6월18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일본 자위대 창립 50주년 행사 당시 일본 여성들이 기모노를 입고 출입하는 보도 사진이 확산되고 있으며, 2008년 일본호텔교육센터가 신라호텔에서 주최한 제14회 ‘료칸ㆍ호텔문화 국제교류 시리즈- 오카미 인 코리아’ 행사에도 료칸(일본식 여관) 여주인들이 기모노를 입고 대거 참석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비난이 폭주했다.한편 네티즌들은 “한복 입었다고 입장 못하게 할 거면 호텔이름을 왜 신라호텔로 지은건지”의문이라는 반응과 함께 “유명한 한복디자이너 이혜순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사장이 직접 찾아가 사과 했겠냐”며 신라호텔의 수습방식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을 쏟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