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사회에 태어나 감사하다”

[현장] 기본소득 첫 번째 학술대회 - 「청년·예술·불안정노동과 ‘기본소득’」

2011-04-29     송병승 기자

[매일일보=송병승기자] 신규 대졸자 실업률이 38%에 달하는 이 시대, 최저임금 1000원을 올리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천지가 뒤집어지는 이 나라에서 “일하지 않더라도 국민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존엄한 생활을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현행 ‘기초생활보장수급제도’가 ‘극빈층보다 못한 차상위층’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이 오히려 더 큰 빈곤을 낳는 한계를 넘어, 일하든 일하지 않든 재산이나 소득이 많든 적든 상관없이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사회의 생산력은 계속 발전하고, 같은 양의 생산을 위해 갈수록 더 적은 양의 노동이 요구되므로, 노동의 대가로 주어지는 노동 비례 소득을 유지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며 사회 구성원들의 삶을 지탱할 수 없다”는 프랑스 경제학자 앙드레 고르의 ‘역설’이 논리적 근거이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 극복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경제학자 J.M. 케인즈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돈 항아리를 땅에 묻어 놓고 사람들에게 땅을 파서 갖고 가게 해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던 ‘유효수요 이론’을 떠올린다면 ‘기본소득’ 담론을 ‘허경영류’의 그렇게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우리 경제 상황에서 ‘높은 수준의 기본소득’도 당장 실현 가능”
“예술가들, 창작과 자유로운 생활, 생존 위해 기본소득 꼭 필요”

“최저임금 안 받으면서 별다른 스킬 요구 안 받는 유일 직종=사교육”
“자연스럽게 정규직, 안정적 일자리, 평생직장 같은 기대가 없어졌다”

기본소득네트워크가 문화연대 및 자립음악생산자모임과 함께 지난 4월 27일 홍익대학교 인근에서 철거 반대 농성을 벌이고 있는 두리반에서 ‘청년, 예술, 불안정노동과 기본소득’이라는 주제로 첫 번째 기본소득 학술대회를 열었다.

발제자와 청중을 포함해 30여명이 참여한 이날 학술대회는 1부 ‘문화예술과 기본소득’(사회 금민 기본소득네트워크 운영위원장)과 2부 ‘청년실업과 기본소득’(사회 곽노완 서울시립대 교수)이라는 주제로 4시간 가량 진행됐다.

1부 ‘문화예술과 기본소득’의 첫 발제자인 강남훈 교수는 대한민국에 대표적인 기본소득 연구 학자로 꼽힌다. 강 교수의 이날 발제는 ‘높은 수준의 기본소득’과 ‘낮은 수준의 기본소득’ 두 가지 방법으로 기본소득이 지급될 수 있다는 점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높은 수준의 기본소득 지급액은 오로지 연령에 의해서만 차이가 나며 55세 미만까지는 연간 400만원, 55세 이상부터 65세 미만까지는 연간 800만원, 65세 이상부터는 연간 900만원을 지급받는 방법이 제시됐다.

강 교수는 “기본소득 도입과 더불어 최저임금을 인상할 필요가 있다”면서 “매년 명목GDP 증가율 이상으로 최저임금과 기본소득을 인상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높은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선진국의 세율보다 낮다”고 강조하며 “이 부분은 우리 경제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강 교수가 주장하는 낮은 수준의 기본소득 모델은 기존의 현금급부형 복지제도의 대부분을 그대로 둔 채 작은 금액의 기본소득을 지급하기 시작하는 모델이다.

강 교수는 “낮은 기본소득 모델은 연금 수급권자와 갈등이 적고, 작은 재원으로 실행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실현가능한 모델이지만 모든 국민들의 최저생활을 보장한다는 기본 소득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 불완전하고 과도기적인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낮은 기본소득 제도의 지급액은 1인당 연간 300만원으로 한다는 것이 강 교수의 주장이다.

음악가=건달?

강 교수에 이어 음악가 단편선이 발제를 진행했다. 단편선은 홍대에서 인디음악을 하며 두리반 투쟁 현장에서 음악으로 사람들을 독려하고 있다.

‘공공재로서의 음악을 향해’라는 주제의 발제에서 단편선은 “자율적인 예술의 영역인 ‘음악’과 시민·생활인·경제인으로서의 ‘음악가’를 분리해서 사고해야 한다”며 “음악의 자율성을 가능한 추구하는 동시에 음악가의생계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조건 없이 생계를 유지할 만큼의 소득을 지급하는 제도 즉 ‘기본소득’이 가장 적절한 대안”이라고 밝혔다.

그는 “최근에 ‘건달’이라는 용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건달이라는 용어가 부처님이 설법하는 자리에 나타나 불법을 노래와 춤으로써 찬탄하고 불법을 수호하는 ‘건달바’라는 고대 인도의 신에서 유래된 것을 최근에 알았다”며 “한국 사회에서는 놀고먹는 사람을 건달이라 하는데 그게 한국 사회의 인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직업이 음악가인데 음악가를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음악가들의 창작활동, 자유로운 생활과 생존을 위해 기본소득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단편선은 또한 현행 저작권에 대해서도 강하게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율적인 예술을 하려면 창작의 자유뿐만 아니라 이용, 향유의 자유도 보장되어야 한다”면서 일정금액의 저작권료를 내야 음원을 다운받을 수 있는 현행 제도에 대해서 비판했다.

“노동과 문화 결합해야”

『풀이 눕는다』, 『영이』 등의 소설을 출간해 2005년 제8회 ‘창비’ 신인 소설상을 받은 바 있는 소설가 김사과는 “문학은 자본주의 적으로 상품화 되지 않은 영역이었는데 최근 5년 새 상품화 되었다”면서 “문학가들이 생계를 위해 창작품을 문화 상품으로 잘 팔아 보려는 전략들이 나타나게 됐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얼마 전 자신과 계약을 맺은 출판사의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예로 들며 “기본소득이 제시되지 않기 때문에 작가들이 상업화될 수밖에 없고 그렇다 보니 문학계 역시 순수 문학이 사라지고 돈을 벌기 위한 문학이 돼버릴 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기본소득이 보장되면 현재 자신의 직업적인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일을 해 볼 수 있고 자신의 스케줄을 자신이 짜서 활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심 교수는 “기본소득이 보장되면 일을 하지 않고 노는 사람들이 늘어날 텐데 놀다보면 편안해 질 수 있고 많은 것에 신경 쓰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생길 수 있다”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연대를 어떻게 지속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며, 더불어 “예술가들이 기본소득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앞서서 활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 노동운동과 문화운동이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년실업 근원은 임금노동과 자본”

2부에서는 현재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청년실업’ 문제와 연관해 기본소득 제도의 필요성에 대한 발제가 이어졌다. 권문석 기본소득 네트워크 운영위원은 “청년실업과 불안정 노동의 근본적인 문제들은 임금노동과 자본의 문제”라면서 “임금노동만이 일로 인정받는 세상에 대한 불평등한 구조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권 위원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경제는 승자독식체제, 정치는 지체되고 새로운 것은 오지 않는다”라며 “법은 사후적이고 시대에 역행하며 과거의 퇴물들이 새로운 권력에 영합해 여전히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으며 대다수 사회 구성원들은 물질을 향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권 위원은 기본소득 제도의 성사 여부에 대해 “진보적이고 세상이 확 바뀌어야만 기본소득 제도가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안현호 대구대 일반사회교육학 교수는 총괄적인 부분에서 기본소득정책의 실현을 제시했다. 그는 우선 “기본소득을 현 체제 내에서 시행했을 때 유지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 교수는 “기본소득 수혜 계층이 전체 인구의 70%가 된다”며 “절대 다수가 이득이 되는데 왜 우리는 기본소득이 현실화되기 어렵다고 생각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기본소득 제도 시행을 위해 중요한 것은 70%의 인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기본 소득을 지지하는 것”이라며 “일단 기본소득정책이 실시되면 그 이후부터 경제적인 이익에 있어서 안정적으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안 교수는 “기본소득의 철학은 ‘당신이 이 사회에 태어나 주어서 감사합니다’라는 것이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기본소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며 “우리 모두가 이 사회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기본 소득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눈높이를 낮추라굽쇼?”

2부에서는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이 느끼는 ‘기본소득’ 제도의 필요성에 대한 발제도 이어졌다. 사교육 노동자(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다는 유혜원씨는 “대학 진학률이 80%를 웃도는 시대에 더 이상 대학 졸업장은 하드스킬(Hard-Skill:통상 ‘스펙’이라고 불리는 경력사항)을 보증해 주지 않는다”면서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자연스럽게 정규직, 안정적인 일자리, 평생직장 같은 단어를 기대하지 않게 됐다”고 밝혔다.

유 강사는 “대졸자가 최저임금을 받지 않으면서 별다른 스킬을 요구하지 않는 직종은 사교육이 유일하다”며 사교육은 임금은 높을 수 있지만 불안정하고 보장받을 수 있는 임금이 존재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는 사교육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저축을 할 수 있었던 기간은 하루 10.8시간을 일했던 3개월 뿐이라고 말하며 “모두에게 조건 없이 지급하는 기본소득은 이러한 현실에 놓여 있는 사교육 노동자들에게 다메(일본어로 저수지를 뜻하는 ‘다메이케’의 줄임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 진입을 준비하고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생인 홍명교씨는 “이번 발제를 준비하면서 청년세대가 기본소득 운동을 어떻게 펼쳐나갈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청년 세대가 ‘청년실업’, ‘불안정 노동’등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때 ‘청년들이 너무 눈이 높다’고 이야기한다”며 “이것은 볏집 공급을 중단해 놓고 벽돌은 정해진 수대로 만들라고 강요한 파라오의 잔혹하고 우스꽝스러운 명령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고 지적했다.

또한 홍씨는 “기본소득에 대해서 말할 때 기본소득이 무엇을 해주겠다거나, 우리 당이 집권하면 기본소득 제도를 만들어서 무엇을 하겠다고 설득하는 것은 곤란하다”며 “기본소득 운동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구성원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자기시간을 해방시키고 조절하고 설계하는 과정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