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숨은 주역, 최초 '삭발 여대생' 박춘애씨

2008-06-09     매일일보

【매일일보제휴사=뉴시스】"6월 항쟁의 정신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제 삶의 원천입니다"

광주 금당중학교 도덕교사 박춘애씨(43). 시민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무너트리고 민주화의 꽃을 피운 6월 항쟁은 그녀를 '최초의 삭발 여대생'으로 기억하고 있다. 화장기없는 맨 얼굴에 수수한 옷차림, 가지런히 묶은 머리까지. 20년전 모습 그대로다. 그땐 민주화를 목놓아 외쳤고, 지금은 교실 곳곳에 참교육을 수놓고 있다. 1987년 6월16일 오후 4시. 전남대 중앙도서관(일명 백도) 앞 광장. 댕기머리에 옥색저고리, 검은 통치마를 곱게 차려입은 한 여학생이 '제2차 전남대 민주학생 비상총회'에 참석한 3000여명의 학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 곁에는 검은 두루마기 차림의 김승남 총학생회장과 문현승 5월 특별위원회장이 나란히 자리했다. 이윽고 김 회장과 문 위원장이 "4.13호헌조치 철폐와 직선제 개헌 쟁취"를 외친 후 결연한 의지의 표현으로 삭발을 결행했다. 이어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여대생인 박씨가 당시로선 충격적인 삭발에 나선 것. 가지런히 딴 머리가 한번의 가위질에 싹뚝 잘려나갔다. 샥샥거리는 이발기에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떨어졌다. "울지 않으리라 맹세했지만 차마 복받쳐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순 없었다"고 박씨는 그렇게 '그 날'을 회상했다. 깡그리 밀어낸 민머리는 학과 후배들은 물론 집회참가자들의 심금을 울렸고, 광장은 일순 분노와 눈물의 바다로 변했다. 이내 20여명의 남학생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몰려 나와 웃옷을 벗고 손을 깨물어 혈서를 쓰기 시작했다. 계획에도 없던 100여명의 학생들이 혈서에 동참했고, 흰 광목천에 피로 쓴 '직선제 개헌 호헌 철폐'는 이후 광주.전남 6월 항쟁을 범시민적 투쟁으로 이끄는 도화선이 됐고, 그 중심에는 '삭발 여대생' 박씨가 있었다. 실제 16일 투쟁에 이은 17일 집회에는 6000여명의 학생들이 운집했고, '삭발.혈서 시위'는 이후 군부독재의 '6.29 항복선언'이 도출될 때까지 광주.전남 6월 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저고리와 치마, 싹둑 잘린 댕기머리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가 늘 간직하고 다니는 '보물 1호'다. "열심히 살았던 모습이 퇴색돼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머리카락과 옷가지를 늘 곁에 둔 채 살고 있다"는 그녀는 과거의 민주투사에서 이젠 어엿한 중견교사로 살아가고 있다. 당시 총여학생회장이었던 그는 항쟁이듬해인 1988년 졸업과 동시에 교단에 섰으나 전교조 활동을 이유로 넉달만에 해직당한 후 지난 94년 복직, 본량, 치평, 서광, 두암중을 거쳐 현재 금당중 교사로 재직중이다. "이젠 생활 속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희망이 싹트는 교실을 만드느라 여념 없다"는 그녀는 집단 따돌림 해결 창구로 '나눔 공책'을 만드는 등 학교폭력이나 왕따에 관한한 전문가로 인정받는 등 20년 전 모습 그대로 당찬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박씨는 "시위에 참가한 대학생, 삭발 후 가발을 쓴 채 가두시위에 나선 저를 보고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은 시민들, 퇴근후 집회에 합류한 '넥타이 부대' 모두가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싹틔운 6월 항쟁의 진정한 주역들"이라고 말했다. /송창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