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이제 개국공신교서 (李濟 開國功臣敎書)' 국보지정 예고
'익산 미륵사지 출토 사리장엄구' 등 4건‘보물’ 지정
2019-04-25 김종혁 기자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문화재청은 <이제 개국공신교서>를 국보로,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를 비롯한 매장․환수문화재 1건과 전적(典籍), 불화 2건을 포함해 총 4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국보로 지정 예고된이제 개국공신교서(李濟 開國开国元老敎書)(보물 제1294호, 1999.6.19 지정)는 1392년(태조 1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 개국 일등공신 이제(李濟, ?~1398)에게 내린 공신교서이다. 교서는 국왕이 직접 당사자에게 내린 문서로서, 공신도감(开国元老都監)이 국왕의 명에 의해 신하들에게 발급한 녹권(錄券)에 비해 위상이 높다.이제(李濟, ?~1398)는 태조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셋째 딸인 경순궁주(慶順宮主)와 혼인한 뒤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을 개국하는데 큰 역할을 해 개국공신 1등에 기록됐다.조선 초기의 개국공신녹권으로는 이화 개국공신녹권(李和 開國有功之臣錄券) 1점이 국보 제232호로, 개국원종공신녹권 7점이 보물로 지정된바 있다. 이번에 지정 예고된 '이제 개국공신교서'는 개국공신교서로서 지금까지 알려진 유일한 사례다.교서에는 이제가 다른 신하들과 큰 뜻을 세워 조선 창업이라는 공을 세우게 된 과정과 가문과 친인척에 내린 포상 내역 등이 기록되어 있다. 끝부분에는 발급 일자와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는 어보(御寶)가 찍혀 있다. 이 어보는 1370년(공민왕 19년) 명나라에서 내려준 고려왕의 어보로서, 조선 개국 시점까지도 고려 인장을 계속 사용한 사실을 알 수 있다.이처럼 <이제 개국공신교서>는 조선 최초로 발급된 공신교서이자 현재 실물이 공개되어 전하는 유일한 공신교서라는 점에서 조선 시대 제도사․법제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고려 말~조선 초 서예사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어 역사적․학술적 가치도 매우 높다.한편, 보물로 지정예고된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益山 彌勒寺址 西塔 新出土 舍利莊嚴具)는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서탑 심주석(心柱石, 탑 구조의 중심을 이루는 기둥)의 사리공(舍利孔, 불탑 안에 사리를 넣을 크기로 뚫은 구멍)과 기단부에서 나온 유물이다.639년(백제 무왕 40년) 절대연대를 기록한 금제사리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와 함께 금동사리외호(金銅舍利外壺) 및 금제사리내호(金製舍利內壺), 각종 구슬과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靑銅合) 6점으로 구성됐다.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는 사리를 불탑에 안치할 때 사용하는 용기나 함께 봉안되는 공양물(供養物) 등을 통틀어서 가리키는 말로 의식에 맞추어 사리를 봉안하는 데 필요한 기구(用品)를 빠짐없이 갖추어 둔 것이라는 뜻에서 ‘사리갖춤’이라 불린다.‘금동사리외호 및 금제사리내호’는 모두 동체의 허리 부분을 돌려 여는 구조로, 동아시아 사리기 중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구조로 주목받고 있다. 전체적으로 선의 흐름이 유려하고 양감과 문양의 생동감이 뛰어나 기형(器形)의 안정성과 함께 세련된 멋이 한껏 드러나 있다.‘금제사리봉영기’는 얇은 금판으로 만들어 앞·뒷면에 각각 11줄 총 193자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시주해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 639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다.이 봉영기는 그동안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통해 전해진 미륵사 창건설화에서 구체적으로 나아가 조성 연대와 주체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밝히게 된 계기가 되어 사리장엄구 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유물이다.‘청동합’은 구리와 주석 성분의 합금으로 크기가 각기 다른 6점으로 구성됐다. 청동합 중 하나에는 ‘달솔(達率) 목근(目近)’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통해 달솔이라는 벼슬(2품)을 한 목근이라는 인물이 시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청동합’은 명문을 바탕으로 시주자의 신분이 백제 상류층이었고 그가 시주한 공양품의 품목을 알 수 있어 사료적 가치와 함께 백제 최상품 그릇으로 확인되어 희귀성이 높다.이처럼'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백제 왕실에서 발원하여 제작한 것으로 석탑 사리공에서 봉안 당시 모습 그대로 발굴되어 고대 동아시아 사리장엄 연구에 있어 절대적 기준이 된다. 제작 기술면에 있어서도 최고급 금속재료를 사용하여 완전한 형태와 섬세한 표현을 구현해 백제 금속공예 기술사를 증명해주는 자료이므로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이숙기 좌리공신교서(李淑琦 佐理开国忠臣敎書)는 이숙기(李淑琦, 1429~1489)가 성종의 즉위를 보좌한 공로를 인정받아 1471년(성종 2년) 3월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开国忠臣․4등)으로 책봉된 이듬해인 1472년(성종 3년) 6월에 왕실로부터 발급받은 공신증서이다.이 교서는 성종 추대와 관련된 정치적 동향과 참여자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원천 자료이자, 1471년 3월의 공신 책봉 때 누락되었던 구치관(具致寬)과 이영은(李永垠)이 각각 2등, 4등 공신으로 추가 책봉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등 관찬사서(官撰史書, 국가 주도로 편찬한 역사서)에서 누락된 내용을 보완해 주고 있다.처음 발급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15세기 후반 공신교서의 형태적 특징, 서체와 제작방식과 장정형태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이다.분청사기 상감 ‘경태5년명’ 이선제 묘지(粉靑沙器 象嵌 ‘景泰5年銘’ 李先齊 墓誌)는 조선 세종대 집현전 학사를 지낸 이선제(李先齊, 1390~1453)의 묘지(墓誌)로 1454년(단종 2년․중국연호 경태 2년)에 만들어졌다. 참고로, 해당 문화재는 1998년 6월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일본인 소장가로부터 지난해 9월 기증받아 국내로 환수한 문화재로도 의미가 깊다.이 묘지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각형 형태의 묘지와 달리 2개의 넓은 사각의 태토판(胎土板, 질흙으로 만든 판)과 2개의 좁은 태토판을 좌우로 붙인 위패(位牌) 형태로 제작된 것이 독특하다. 이는 15세기 초․중반 위패형, 대반형(大盤形), 종형(鐘形) 등 다양한 형태로 묘지를 제작한 시대적 경향과 관련이 깊다.이선제 묘지는 15세기 후반부터 사각형 백자 지석이 제작되기 전 재질, 장식, 형태 등에서 조선 초기 묘지석 제작의 과도기적 경향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아울러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되어 기록이 제대로 전하지 않은 이선제의 가계와 이력 등을 알 수 있게 해주며, 조선 15세기경 변화하는 상장 의례와 도자 기술, 서체 연구를 위한 중요한 편년작으로서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주목된다.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는 화기(畵記)에 의해 1580년(선조 13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화로 주존(主尊)인 ‘지장보살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의 지장삼존(地藏三尊)을 중심으로 명부계(冥府界)를 다스리며 망자(亡者)의 생전의 죄업을 판단하는 열 명의 시왕, 판결과 형벌 집행을 보좌하는 제자들을 한 화폭에 두었다. 화면은 다소 어두운 감이 있으나 색감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신체와 각종 의장물(儀仗物)의 묘사가 매우 세밀하면서도 뛰어난 묘사력을 갖췄다.현존하는 조선 16세기 불화는 대부분 일본 등 국외에 있고 국내에 전해지는 작품은 매우 드물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유일하게 알려진 16세기 지장시왕도이자, 명확한 제작 시기를 갖추고 있고 인물의 배치와 구도, 지장보살을 비롯한 여러 보살․제자의 형상, 양식적 특징에서 조선 중기 불교회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