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 선관위에 ‘승부수’…노림수 있나?

선관위, 노 대통령에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 결정 벌써 3번째 통보…靑 선관위 결정 ‘딜레마’ 발언 뒤 선관위와 ‘대격돌’ 움직임

2007-06-21     최봉석 기자

‘고무줄’ 선관위 논란 속에 선관위는 ‘불편하고’ 한나라는 ‘반발’하고… 
 
청와대와 선관위의 본격적인 충돌이 예상되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고현철)는 노무현 대통령의 원광대 특강과 6.10 민주화항쟁 20주년 기념사, 한겨레신문사와의 특별인터뷰가 선거법상 ‘공무원의 중립의무 조항’을 위반한 것으로 지난 달 18일 판단, 선거중립의무 준수요청 공문을 다음 날인 19일 노 대통령에게 보냈다.

중앙선관위는 19일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 준수 재촉구’ 공문을 통해 “대통령은 선거법 9조에 의해 선거에 있어서 중립 의무를 지고 있으므로 정치적 의견을 표명하는 경우에도 대통령직의 중요성과 언행의 정치적 파장에 비추어 선거가 임박한 시기에는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발언을 자제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선관위는 18일 오후 제9차 선관위원 전체회의를 열어 ‘대통령의 선거 중립의무를 위반했다는 요지의 결정문’을 발표했는데 선관위의 이번 결정은 두번째 위법 판단이 내려진 지 11일 만에 또다시 이뤄진 까닭에, 노 대통령에 대한 한나라당의 집중 공세가 한층 강화되는 등 정치권에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선관위의 결정에 대해 청와대는 “대통령의 입을 봉하라는 것이다. 선관위에 일일이 질의하겠다”고 밝히면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하고, 급기야 21일에는 ‘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표현 자유가 침해됐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해 선관위의 결정에 따른 ‘논란과 정쟁’이 야기될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정치권에서 제기되고 있다. 선관위도 청와대의 방침에 직ㆍ간접적으로 불만을 토로하고 나섰다.

지난 18일 선관위는 “원광대 강연과 6.10항쟁 기념사, 한겨레신문사 인터뷰에서 특정정당 및 후보자가 되고자 하는 자를 폄하하고, 특정정당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여권의 대선 전략에 대해 언급한 것은 공무원의 선거에서의 중립의무를 규정한 선거법 9조를 위반했다”며 “다시 한번 선거법 준수를 촉구하는 공문을 발송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선관위는 이어 “지난 7일 참여정부평가포럼에서 대통령의 발언이 선거중립의무에 위반됨을 결정하고 대통령에게 선거중립의무 준수를 요청했음에도 재차 이런 사태가 발생한 데 대해 깊은 유감”이라고 표명했다. ‘정치 중립 의무’ 조항에 대해서는 처벌 조항이 따로 없다. 선관위는 그러나 “다만 대통령의 이런 발언이 사전 선거운동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앞으로 상황을 지켜본 뒤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선관위가 이처럼 ‘선거중립 의무’ 위반만 잇따라 반복한 데 대해 일각에선 “선관위가 대통령의 정치적 표현에 대해 명확한 해석 범위를 가리지 못하겠다고 실토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문제는 청와대의 반응이다. 청와대가 선관위의 결정과 관련해 21일‘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표현 자유가 침해됐다’는 사유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헌법소원은 ‘대통령이 주체’가 되는 것으로 헌정사상 최초의 일이다.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은 기자간담회에서 “기본적으로 개인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국민 누구가 갖고 있다”며 “대통령이기 때문에 (기본권이)제한되는 것이 아니라면 국민의 기본권인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침해당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상황이 이렇자 범여권의 각 정파는 “노 대통령이 선관위의 결정에 승복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중도개혁통합신당 양형일 대변인은 구두논평을 통해 “노 대통령은 중앙선관위의 이번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앞으로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도록 대통령의 자제를 거듭 촉구한다”고 밝혔고, 민주당 김정현 부대변인도 논평에서 “노 대통령은 선관위 결정에 절대 승복해야 한다. 더 이상의 논란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친노진영은 선관위가 대통령의 정치적 활동을 보장하고 있는 국가공무원법을 무시한 채 사실상 ‘한나라당의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고 해석하면서 강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친노파 한 관계자는 “대통령의 정치적 활동을 보장하고 있는 국가공무원법은 전혀 무시하고, 오로지 선거법상 선거중립이라는 애매한 표현만을 확대해석해 대통령을 법률 위반자로 몰아대고 있다”며 “사실상 대통령의 모든 행위를 언제든지 옭매어 버릴 수 있는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는 형국이고 사실상 한나라당 선거운동”이라고 주장했다.

범여권은 각 정파의 입장에 따라 생각의 차이는 있지만, 큰 틀에서 노 대통령의 선거중립 의무 위반 논란에 대한 한나라당의 정략적 이용을 경계하는 눈치다.

실제 한나라당은 선관위가 사전선거운동 여부에 대해 판단을 유보한 것에 대해 포커스를 맞추고 “선관위가 ‘눈치보기’로 일관하고 있다”면서 한때“노 대통령을 검찰에 직접 고발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 물론 검찰 고발은 잠시 유보한 상태. 이는 청와대가 선관위의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기 때문으로 일단 해석된다.

청와대는 19일 “하루도 빠짐없이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퍼붓는 한나라당은 내버려 두느냐”고 선관위에 물었는데, 실제로 노 대통령을 향한 한나라당의 문제제기로 시작된 선거법위반 논란은 한나라당으로 그 불똥이 튀는 모양새를 띠고 있다.

선관위의 결정이 이같이 정치적 파장을 불러일으키자 정치권에선 ‘선거법 개정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계속 쏟아져나오고 있다.

임채정 국회의장은 “정치가 워낙 불공정하게 진행됐던 역사적 과정에서 법이 상당히 경직된 부분이 있다. 대통령의 발언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민주화도 이뤄지고 더 신장시킬 시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제 선거법중 고칠 부분은 고쳐야 한다”고 밝혔다.

서혜석 열린우리당 대변인은 지난 달 19일 현안 브리핑에서 “현행 선거법은 과거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선거자금과 공무원 조직을 통해 선거에 직접 개입했던 것을 막기 위해 공무원의 선거중립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시대가 변해 지금 대통령은 이런 불법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분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국회 차원에서 검토와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중도개혁통합신당 양형일 대변인은 “대통령의 정치 행위와 선거 개입행위와의 명확한 한계가 불분명하다”면서 “대통령의 정치 행위와 관련해 선거법과 국가 공무원법상 서로 저촉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법개정을 통해 해소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일부 정치전문가들은 청와대의 최근 움직임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의 ‘승부사적 기질’을 꼬집으며, “선관위가 노 대통령의 올가미에 걸려든 것”이라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노 대통령 무슨 말을 했길래…

노 대통령은 지난 달 2일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참평포럼 특강에서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 생각하니 좀 끔찍하다”며 한나라당과 한나라당 소속 대선주자들의 공약을 비판했다가 강연내용에 대해 선관위의 선거법 위반결정과 선거중립의무 준수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다음날인 8일 원광대 강연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대운하 구상과 감세공약을 비판했다.
또 6.10 기념사에서는 “군사독재의 잔재들이 아직도 건재해 역사를 되돌리려 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14일 한겨레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선 “열린우리당이 선택한 후보를 지지하겠다” “한나라당은 지역주의로 아예 굳어진 정당”이라고 발언해 한나라당의 거센 반발을 샀다.
선관위가 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 결정을 내린 것은 17대 총선을 앞둔 2004년 3월 이후 세 번째다. 노 대통령은 당시 경인지역 언론사 기자회견, 방송기자클럽 회견에서 공무원의 선거중립의무를 위반한 발언을 해 선관위로부터 선거중립의무 준수요청 조치를 받은 바 있다.
선관위는 앞서 지난 2003년 12월엔 “내년 총선에서 민주당을 찍는 것은 한나라당을 도와주는 것으로 인식될 것”이라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이후 청와대에 공명선거 협조공문을 보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