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능산리 고분군, 일제강점기 이후 100여 년 만에 재조사 완료
2018-07-04 김종혁 기자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문화재청은 부여군과 함께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사업’으로 추진한 사적 제14호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서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를 완료했다고 4일 밝혔다.부여 능산리 고분군은 능산리산(陵深山老林山)의 남사면에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3개의 군집을 이루고 있다. 위치에 따라 각각 중앙고분군(왕릉군), 동고분군, 서고분군으로 불리며 지난 일제강점기에 세 차례에 걸쳐 조사가 진행되어 15기의 무덤을 확인했다. 이후 중앙고분군의 정비복원 과정(1965~1966년)에서 2기의 무덤이 추가로 확인했으며, 현재까지 모두 17기가 남아 있다.이번 발굴조사 성과는 2016년 6월부터 2018년 6월까지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펼친 서고분군 4기에 대한 것으로, 1917년 일제강점기 이후 100여 년 만에 펼친 조사다. 백제 사비기 왕릉급 무덤의 입지와 조성과정, 초석건물지와 주거지 등에 대한 자료를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특히, 고분군 내 건물의 존재는 삼국 시대 고분군에서 아직 확인된 바 없는 새로운 것으로 주목된다. 서고분군은 능선을 따라 위아래로 2기씩 배치돼 중앙 능선에 2‧3호분이, 동편 능선에 1‧4호분이 있다. 4기 모두 지하 깊숙이 조성된 굴식돌방무덤으로 확인됐다. 무덤의 평면은 현실(玄室, 시신이 안치된 방) 중앙에 연도(排烟道), 묘도(墓道)가 차례로 달려 ‘갑(甲)’자 모양이며, 잘 다듬은 판석(板石)으로 만들었다.무덤의 크기는 봉분 주위를 둘러싼 둘레돌(護石)로 추정해보면 2‧3호분은 지름 20m 내외, 1‧4호분은 지름 15m 내외이다. 2‧3호분과 1‧4호분은 석실의 규모, 석재의 가공 정도, 입지 등에서 차이를 보여 위계 차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유물은 도굴과 일제강점기 조사로 인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2호분의 돌방 바깥의 도굴구덩이에서 도금된 금송제(金松製) 목관 조각과 금동제 관못, 금제장식 등이 나왔다. 3호분과 4호분에서는 목관에 사용된 금동제를 포함한 관고리와 관못이 확인됐다.특히, 2호분에서 출토된 금제 장식은 길이 2.3㎝정도 되고, 전체적인 형태는 끝이 뾰족한 오각형을 띠고 있어 부장품의 끝 부분으로 추정된다. 유물에는 용이 몸을 틀고 있는 형상의 문양이 장식되어 있어 특이하다. 한편, 서고분군 일대를 전면 조사하는 과정에서 고분군과 직접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건물지가 확인됐다. 무덤이 조영되지 않은 서편 능선에서 4×2칸(추정)의 초석건물지 1기, 동편 능선의 1호분과 4호분 사이에서 수혈주거지 2기가 확인됐다. 이 건물들은 위치나 구조로 보아 무덤 조성과 관련된 임시 거처나 제사 관련 시설일 가능성이 있어서 당시 상장례 연구에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서고분군은 1917년 조사 후 ‘능산리 왕릉군의 서쪽 소계곡 너머에 있는 능선에서 무덤 4기를 확인하고 그 중 2기를 발굴하였다’라는 간단한 기록과 4기의 고분 위치를 표시한 간략한 지형도만 남아 있었다. 이번 조사를 통해 100여 년 만에 백제 사비기 왕릉급 무덤의 전모가 드러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