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정 큐레이터의 #위드아트]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

2019-07-05     송병형 기자
푹푹 찌는 한여름으로 들어섰다. 송나라 문인 왕안석의 한시 한구절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 녹음과 꽃다운 풀이 봄경치보다 나을 때라)가 떠오르는 계절이다.주말 부산으로 빠듯하게 1박2일 출장이 있었다. 평소에는 5시간이 되는 장거리 운전도 마다하지 않지만, 장마와 태풍 북상 소식에 덜컥 겁이 나 처음으로 KTX를 예매했다. 좌석에 앉아 느긋한 마음으로 창 너머 풍경을 감상하는데 푸르른 녹음에 복잡했던 머릿속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디론가 떠난다는 설렘이 더해지니 금상첨화였다. 창밖 풍경이 현대인을 사색에 잠길 수 있도록 해준다는 사실을 이때 깨달았다.마침 올해 초 기획 중 달리는 KTX의 창과 창밖의 풍경을 담은 작품이 있었다. 임창민 작가의 작품이다. 임창민 작품을 특징짓는 가장 큰 형식은 배경이 되는 사진 속 창을 통해 영상이 일부 들어오는 것이다. 실내와 실외의 풍경을 합쳐서 작품을 구성하는데 두 개의 다른 공간에 시간을 더하기 위해 사진과 비디오라는 유사하지만 다른 매체를 함께 이용한다. 실내공간을 사진으로 촬영한 다음 창 부분을 잘라내고 비디오를 삽입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찰나의 순간에 기록된 정지되어 있는 사진조차도 과거의 한 장면이 아니라 지금의 현재가 되어버린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 사진과 영상의 경계를 잘 조련할 줄 아는 작가의 감각과 연구가 돋보이는 작업이다.그의 작업 중에서도 'into a time frame 20번'은 무더워지는 지금 시기, 작품 속으로 달려 들어가 의자에 고단해진 몸을 맡기고 싶게 한다. 창밖의 풍경은 실제 기차를 타고 갈 때 촬영한 것으로 촬영을 위해 실제 KTX 한 호실의 창가 측 좌석을 모두 예매해야 했던 작가의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담겨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주로 고즈넉한 실내 풍경에 정적인 영상이 들어가는 임창민 작가의 다른 작품에 비해 운동감이 있고, 빠르게 지나가는 여러 가지 풍경들이 영상으로 연출되는데 흥미롭다.작업노트에 나타난 작가의 생각은 이렇다. "사진이라는 매체는 시간을 표현하기에 힘이 든 반면 영상은 시간을 반드시 담고 가는 매체이다. 두 매체가 결합했을 때 매체의 경계선에서 알 수 없는 스파크가 일어난다. 이를 창을 통해 두 가지 속성을 함께 표현하는데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 공존할 때의 일루전을 주는 것 같다. 나의 작품은 푸른빛을 띠거나 푸른 톤을 가진 작품이 많다. 그 이유는 블루 틴트 유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없는 공간의 청량한 분위기를 연출해서 일 것이다. 작품의 대부분은 시각적 경험이나 기억을 베이스로 한다. 그 경험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로 누구든 유사한 경험이 있을 것이며, 나의 작품을 통해 각자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