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임원이 되는 길…“영어로 말해봐”
[요즘 재계는] 영어 필요 없는 부서도 ‘회화능력’ 인사고가 반영
[매일일보=변주리 기자] 최근 대기업 직원들 사이에 ‘오렌지’를 ‘어륀지’로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회화실력 향상을 위한 노력이 한창이다. 각 회사들이 임원 승진시험에서 토익·토플과 같은 독해나 문법 위주의 공인인증시험보다 ‘영어 말하기’ 실력을 강조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제 구조상 외국인을 상대할 일이 많음에 따라 각 기업들이 인사고과나 승진시험에서 영어능력에 높은 비중을 배분하는 것은 이미 오래된 얘기지만 최근 대기업들이 강조하는 영어능력은 과거와는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자기계발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직원들도 늘고 있지만 “영어를 필요로 하는 업무도 아닌데 무조건 영어 학습을 강요하고 있다”며 볼멘소리를 내는 목소리도 여전히 적지 않게 들린다.
“토익 800점 받아도 말 한마디 못하면 무용지물”
‘자기계발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 반응도
모 재벌그룹 중간간부인 K씨는 매일 아침 업무 시작시간인 8시보다 한 시간 이른 7시에 출근한다. 사내에서 지원해주는 사이버 영어 강좌를 듣기 위해서다.
대부분의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K씨가 다니는 직장에서는 사이버 영어 강좌를 개설, 사원들의 영어실력을 높이는데 많은 투자를 하고 있으며 영어회화 실력이 승진을 위한 인사고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승진하고 싶다면 ‘스피킹’
최근 대기업들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당근과 채찍을 써가며 직원들의 ‘영어 회화 실력 끌어올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사이버 강좌와 강사 초빙 등을 통해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대신 임원 승진 평가에서 엄격하게 영어 회화 실력을 반영하려는 대기업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글로벌 한화’라는 기치를 내건 한화그룹은 2013년부터 위해 영어 말하기 시험의 일종인 ‘OPIc(Oral Proficiency Interview - computer)’에서 일정 등급 이상을 반드시 넘어야 임직원들이 승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동안 한화케미칼 등 몇몇 계열사에서 인사평가 및 일부 직급의 승진심사 때 OPIc 등급을 반영하기는 했으나, 이번에 전 계열사로 확대됐다.
국내보다 해외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큰 현대자동차 역시 올 하반기부터 영어 승진시험을 중간간부 대상으로 확대, 내년 1월1일 이후 적용하는 방침을 내부 논의 중이다. 평가 방법에 있어서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결정된 사항은 없지만, 필기가 아닌 말하기 실력 검증이 중점적으로 이루어질 예정이다.
LG그룹은 임원 승진 대상자에 한해 LG인화원에서 자체 개발한 영어구사능력 평가시스템 ‘LGA LAP 테스트’를 받도록 하고 있다. 이 테스트는 말하기와 쓰기 테스트로 구성되며 말하기의 경우 외국인과의 대화를 녹음, 내용을 분석해 총 9단계로 평가한다. 임원 승진을 위해서는 상위 5등급인 3.0이상을 받아야 한다.
대기업들의 이 같은 흐름은 토익·토플 등 공인어학성적 점수를 기준으로 직원들의 영어능력을 평가했던 불과 몇 해 전과 다른 양상이다.
취업전문 포털 잡코리아가 2008년 초 실시한 매출액 순위 상위 500대 기업 중 372개 사를 대상으로 ‘승진심사 시 영어능력 평가여부’ 관련 조사 결과, 조사 대상기업 56.2%가 ‘승진평가 기준에 영어능력이 포함돼 있다’고 밝혔지만 평가방법에 있어선 ‘토익·토플·텝스·G-TELP 등의 공인어학성적 점수 반영’이 82.8%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당시까지만 해도 상당수 대기업들이 실제 커뮤니케이션 능력보다는 토익·토플 등 공인어학성적 점수를 기준으로 직원들의 영어능력을 평가했으며, ▲영어회화 평가(13.4%) ▲사내 자체 평가 시험(8.1%) ▲오픽(5.3%) 등 회화 실력은 그 다음 순으로 반영한 것이다.
“재밌어 하는 직원들도 많아”
이렇듯 최근 대기업들이 영어 ‘필기’ 능력보다 ‘회화’ 능력을 강조하는 분위기에 대해 한화그룹 홍보실 관계자는 “토익이나 토플 같은 공인인증시험에서 성적을 많이 받아도 말 한마디 더 잘하는 것이 실무에선 중요하다”며 “토익 800점 이상 맞아도 말 한마디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설명했다.
현대자동차 홍보실 관계자 역시 “신입사원 채용 시에는 다른 것으로 평가 할 수 없기 때문에 토익이나 토플 같은 시험으로 평가하지만 회사 내에선 실용성 있는 영어가 필요하다”며 “현대차는 글로벌 기업이기 때문에 이번에 논의 중인 임원 평가 이전에도 영어회화 실력은 임원 승진에 매우 중요한 기준이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괄적인 공인인증시험으로 평가할 때와 마찬가지로 외국어 능력이 필수적인 관련 부서가 아닌 모든 직원이 영어에 매달리도록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불만과 함께 본래 업무나 전공 분야에 집중하는 게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지적이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회사의 요건에 맞추기 위한 영어 학습으로 인해 직장인들 대부분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설문조사 역시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한 포털사이트의 직장인 영어회화 스터디 모임 회원은 “내가 있는 부서는 전혀 영어를 쓰지 않는 부서임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못해서 승진하지 못한다는 게 억울하다”며 “이번 평가에서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나만큼 일 잘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하며 큰소리 치고 그만 둘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와 관련 한화그룹 관계자는 영어 업무와 관련이 없는 부서에서 영어회화 실력을 강조하는 것은 부당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요즘 같은 시대에 영어 스피킹 능력은 기본”이라며 “영어 관련 업무 부서에서는 영어 이외에 다른 역량을 더 많이 개발하고 요구 받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스트레스도 받고 피곤하기도 하겠지만, 자기계발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며 “기업 차원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해 주는 데다 강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즐거워하고 재밌어 하는 직원들도 많다”고 덧붙였다.
한편, 현대자동차 관계자는 “어느 정도 그런 부분을 감안해 현대차는 본사와 공장의 시행일정을 다르게 적용할 예정”이라며 “공장의 승진 대상자들의 경우 2013년부터 영어회화실력 평가를 반영하기로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