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대선 앞두고 침묵하는 까닭은?

대통령 선거 외면하고 있는 재계…‘속사정 따로 있다’

2007-09-19     최봉석 기자

각 기업들 내부적으로 대선결과에 대한 예측 다각적으로 분석

재계 “기업 대변할 수 있는 인사 지원하는 분위기 형성될 듯”

[매일일보닷컴] 한나라당 경선을 통해 이명박 후보가 선출되고, 대통합민주신당도 후보선출을 위한 경선 레이스에 가속도를 내면서 정치권은 그야말로 대선으로 인해 뜨겁게 달궈지고 있지만 재계는 ‘선거의 해’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조용하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조용한 움직임 때문에 재계가 ‘대통령 선거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세간의 분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속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계가 대선을 외면하는 속사정은 따로 있다.

경제전문가들은 “조용한 것이 아니고 눈치를 보고 있는 것(판세를 분석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대선과 관련된 움직임을 자제하고 있을 뿐, 각 기업 내부적으로 대선결과에 대한 예측을 다각적으로 분석하는 등 오는 12월19일 대선 결과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재계는 대선을 앞두고 특정정당 및 정파와 한 배를 타면서 결과적으로 ‘불필요한 잡음’을 불러일으켰던 게 사실. 재계는 97년 대선과 2002년 대선 때 정치자금 파동으로 호된 홍역을 치른 바 있다. 이 때문에 올해 대선에선 유력 대선후보에 줄을 대기가 쉽지 않은 상황. 한마디로 ‘눈치’를 보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현재까지는 최소한 불법 정치자금과 관련해서는 과거와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면서 “대선캠프 인사들이 접근해오는 것을 피하거나 아예 차단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재계의 이 같은 정치권 ‘눈치보기’로 인해 정작 골머리를 앓고 있는 쪽은 당연히 유력 대선주자들이다. 대선문화가 워낙 대규모 조직과 이에 따른 엄청난 자금을 필요로 하는 터라 ‘합법적’인 선거자금 모금만으로 선거를 치르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는 대선주자들은 그야말로 돈줄 마련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 정치권이 과거처럼 기업에 손을 내미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기업 측도 이번만큼은 단호한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조석래 전경련 회장은 지난 7월 “이번 대선에서 재계는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실제로 재계는 올해 대선레이스가 본격화되는 9월 하순 이후부터 해외출장길에 오르거나 사무실에 출근을 하지 않고, 집이나 안가로 잠적해 버리는 계획까지 세우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치권과 연락 차단하라 ‘특명’
 
일부 언론보도 등을 요약하면 재벌그룹들은 9월 이후 총수들의 해외현장경영 일정과 외부와 연락을 차단할 수 있는 경영전략 마련 시간을 만들기 위해 분주한 모습. 재계 일각에선 ‘대선캠프들이 자금줄을 마련하기 위해 접촉할 요량이면 아예 외면해 버려라’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두 차례에 걸친 불법 정치자금 제공으로 인해 기업 경영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던 과거지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칫 정치권에 노출이 될 경우 올해 역시 유력 대선주자에 ‘보험’을 들어야 한다는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과거에 그러했듯 대선자금 요청이 선거를 2~3개월가량 앞두고 집중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야 후보 간 맞대결이 펼쳐지는 10월에 들어갈 경우 지금과 같이 ‘정경유착 고리는 끊어져야 한다’는 당연한 논리가 지금처럼 지속될지는 사실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그렇다고 재계가 무작정 대선구도 속에서 ‘나몰라라’하고 있는 것만은 아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재계로서는 10월 국정감사를 앞두고 재계와 관련된 각종 사건들이 쏟아져 나올 가능성이 높아 섣불리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또한 무작정 정치권을 외면했다가는 ‘괴씸죄’에 걸려, 차기 정부에서 큰 화를 불러 올 수 있다는 판단도 정치권을 무작정 외면할 수 없는 한 이유다.A그룹의 경우 이 회사 CEO는 간부급들에게 연말 대선과 관련한 각계의 움직임을 파악해 보고토록 지시해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부산스런 상황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 그룹은 그동안 정치권과 불가근 불가원의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이로 인해 각종 대형 M&A에서 헛발질만 해온 기업으로 낙인찍혀 이번에는 정치권의 기류를 파악해 향후 업무 추진과정에서 다시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계획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 회사 CEO의 경우 그룹 고문단 등과 수시로 전화접촉을 하거나 면담을 하면서 연말 대선전망을 관측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감 의식하며 촉각 곤두세우는 기업들

상당수 기업들도 국감을 의식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국감을 앞두고 재벌총수들 중 몇몇 인사들이 증인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벌써부터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국감을 앞두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기업은 경영권 승계 문제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 떠들썩하게 했던 S그룹을 비롯해, L그룹, G그룹, H그룹 등이라고 재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어찌됐든 본선이 진행되면 정치권은 재계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는 불 보듯 뻔한 상황이 연출될 것이 분명하고, 재계 역시 내년 정권이 누구에게 돌아가느냐를 분석하며 유력 대선주자에 대한 ‘보험들기’가 반복될 것이라는 게 정치경제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재계 한 관계자는 “과거와 같은 불법 정치자금 제공은 당연히 사라지겠지만, 재계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인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미 경제계의 시선이 모 특정후보에게 고정돼 있다는 의혹마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이런 분석 때문에 재계가 요즘 조용한 까닭에 대해 “조용한 것이 아니라 바짝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름대로 설득력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 재계의 한 유력인사는 “대선이 빨리 끝나기만 기다릴 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