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 내 ‘신격호 위력’ 여전해…노익장 어디까지
추석연휴도 진땀 빼는 ‘업무보고’ 이어져, 주가 회복 지시 얘기도
2008-09-20 권민경 기자
[매일일보닷컴] 유통왕국 롯데그룹 내 ‘신격호 위력’이 여전하다는 말이 재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잠실 제2롯데월드 건립을 비롯해 야심차게 추진해왔던 사업들의 난항으로 울적해하던 롯데가 최근 신격호 회장이 경영 현안 챙기기에 나서면서 부쩍 반전의 분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
짝수 달에는 일본, 홀수 달에는 한국을 오가며 셔틀경영을 해오던 신 회장이 9월 국내에 머물며 계열사 사장단들을 진땀나게 할 만큼 업무 보고를 받고, 롯데쇼핑 주가 회복 등의 특명을 내린 것으로 알려지면서 롯데에 대한 관심이 새로워지고 있다.
그동안 재계에서는 롯데가 신 회장의 둘째 아들인 신동빈 부회장 체제로 진입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지난해 연말과 올해 초 신 회장이 홀수 달에도 국내에 들어오지 않자, 신 부회장에게 좀 더 무게를 실어주고 그의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요사이 신 회장의 행보를 두고 재계에서는 신 회장의 ‘노익장’이 건재하다는 분석이다.
최근 신격호 회장은 롯데쇼핑 이철우 사장을 비롯해, 롯데마트 노병용 대표 등 주요 계열사 사장단을 불러놓고 영업실적과 사업계획 등에 대한 업무보고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철우 사장에게는 롯데의 해외진출 1호 백화점인 모스크바점을 성공적으로 오픈한 것에 대한 치하와 함께, 롯데 컨소시엄이 사업자로 선정된 판교 신도시 중심상업용지 사업 전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물었다고 한다. 홀수 달에는 국내에 들어와 한 달 내내 꼼꼼한 업무보고를 받는 신 회장은 사장단들이 당황할 만큼 질문공세를 퍼붓는가 하면, 실적이 좋지 않은 계열사에 대해서는 무서운 질책을 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롯데 측에 따르면 심지어 이번 추석 연휴 기간에도 일부 계열사들의 업무보고가 계속된다. 49개에 이르는 계열사들의 사업 전반을 보고 받으려면 한 달을 꽉 채워도 모자라기 때문. 다만 연휴 기간에는 국내 계열사들은 제외하고, 일본 쪽 사업체의 브리핑을 주로 받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 재벌 총수 가운데 최고령인 86세의 나이에도 신 회장이 이처럼 평일과 연휴를 가리지 않고 경영현안을 챙기자 롯데 안팎에서는 신 회장의 ‘노익장’이 여전하다는 말들이 많다. 신동빈 부회장 체제 출범 3년을 맞아 그룹 주요 사업들이 신 부회장의 지휘 아래 이루어지고 있고, 최근 인사에서도 신 부회장 쪽에 무게를 실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전면에 포진하면서 그의 경영권 승계가 임박했다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말’ 한마디로 그룹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건 신 회장 뿐이라는 게 재계 관계자들의 전언. 특히 주요 계열사의 인사권과 최종 결재권 역시 신 회장이 전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그룹 관계자 역시 “사장단 임명 등은 여전히 신 회장 고유의 일”이라고 귀뜸했다.경영 현안 꼼꼼히 체크…주가 회복 특명까지
신 회장의 여전한 위력은 하락세를 면치 못하던 롯데쇼핑 주가의 최근 변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지난해 초 상장된 롯데쇼핑 주식은 업계의 기대와 예상을 깨고 1년이 넘도록 공모가인 40만원에도 미치지 못하고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다 지난 7월 1년 3개월 만에 처음으로 40만원대 공모가를 깨고 치솟으며 최근까지도 호조세를 이어오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롯데의 우리홈쇼핑 인수와 관련된 방송위원회 승인에 대한 법원의 적법 판결, 롯데카드와의 시너지, 경쟁사인 신세계와 현대백화점 등에 비해 저평가 됐다는 점과 함께 내수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 등이 상승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롯데 안팎에서는 ‘공모가 회복’에 대한 신 회장의 ‘특명’이 주가 상승에 한 몫을 했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주가 부진에 대한 신 회장의 지적이 있고 난 뒤 롯데쇼핑 내부에서는 회사 차원의 주가 끌어올리기에 나섰다고 알려져 업계의 관심을 끌었다. 3/4분기 추정실적이 발표되는 오는 10월까지 공모가 40만원을 회복하는 ‘공모가 회복 프로젝트’를 가동시켰다는 얘기까지 나오기도 했다. 물론 롯데 측에서는 “추측이 와전된 것 뿐”이라며 “신 회장이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주가를 챙기라’는 말을 전했을 개연성은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나이 잊은 현장 경영, 굵직한 사업 직접 챙기기도
롯데에서 추진하고 있는 굵직한 사업에 대해서도 신 회장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여전히 엿볼 수 있다. 신 회장은 러시아에 호텔과 쇼핑몰 등을 갖춘 복합 센터인 ‘롯데센터’건설을 비롯해 지난 1일 문을 연 롯데백화점 해외진출 1호점인 모스크바점 관련 내용을 직접 챙기는 등으로 여름 내내 바쁜 일정을 보냈다. 라이벌인 신세계와 현대백화점을 제치고 총 사업비 5조원 규모의 판교 신도시 역세권 프로젝트 파이낸(PF) 사업권을 따낸 것 역시 이 사업에 대한 신 회장의 지대한 관심이 그룹 내부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는 후문이다. 이를 입증하듯 신 회장은 선정 후에도 롯데쇼핑 이철우 사장을 불러 판교 상업용지에 들어설 롯데백화점과 마트의 입점계획 등을 체크하고, 점포의 면적, 영업면적 등까지 치밀하게 따져 물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신 회장의 잦은 현장경영 역시 여전한 그의 ‘건재함’을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이다. 고령의 나이에도 건강이 좋은 편으로 알려진 신 회장은 해외 출장길에 올라 답보 상태에 있는 사업장 등을 직접 챙기는 등 활발한 경영 행보를 보이고 있다. 신 부회장이 글로벌 경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해외사업이 난항에 부딪혔을 때 이를 풀기 위한 가장 확실한 ‘구원수’는 아직까지 신 회장이라는 얘기다. 지난해 9월에는 2년 여 만에 중국과 대만 출장길에 나서 열흘 동안 롯데제과와 롯데칠성음료 사업장을 둘러보고, 부지 선정 문제로 지지부진한 상태를 계속해오던 ‘롯데월드 차이나’사업을 직접 점검하기도 했다. 해외사업장 뿐 아니다. 국내에서도 별도의 수행원 없이 수시로 백화점에 들러 매장 곳곳을 꼼꼼히 둘러보는가 하면, 판매 직원들을 상대로 세세한 부분까지 체크해 관계자들의 진땀을 빼놓기도 한다. 심지어 이 같은 매장 순회를 1시간 넘게 지속할 때도 있다고 한다.신동빈 부회장, 해외사업만큼은 독자적으로 추진
롯데 내에서 신 회장의 ‘왕권’이 이처럼 여전한 가운데 한편에선 신 부회장 또한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견고히 다지며 대권 승계를 향한 행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글로벌 시장 개척에 있어서만큼은 신 부회장이 사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는 것에 이견이 없다. 지난 2일 롯데백화점 모스크바 점 오픈과 관련해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신 부회장은 “굵직한 사안은 부친인 신격호 회장님과 의논하고 있지만, 해외사업 부문은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어 “아직까지 그룹 전체에서 해외부문 비율은 10% 가량이지만, 롯데백화점 중국 베이징점과 롯데마트 베트남 호치민점이 문을 여는 내년이면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이를 입증하듯 신 부회장은 “롯데의 경쟁상대는 국내 기업이 아닌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글로벌 기업”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중국과 중동을 거점으로 세계 무대 진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3월 중국에 롯데 식음료 부분 지주회사를 설립하는가 하면, 주력 계열사인 호남석유화학은 국내 업체로는 처음으로 카타르 메사이드 공업단지 내에 오는 2010년 완공을 목표로 총 26억달러(롯데 지분 30%)의 석유화학 콤플렉스를 세우고 있다. 이밖에도 러시아 모스크바에 국내 첫 해외진출 백화점을 최근 오픈한 데 이어 내년에는 중국 베이징 핵심상권에 중국 1호점을 세우고 동북3성 지역을 중심으로 매장을 확대할 계획이다. 롯데마트 역시 상반기 중에 호찌민에 베트남 1호점을 착공, 현지에서 총 20여개의 매장망을 확보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