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 그는 누구인가?

대권 3수 도전... YS로 정계입문 ‘깜짝 놀랄 젊은 후보’

2008-09-24     매일일보

[매일일보제휴사=폴리뉴스] 지난 20일 민주당 첫 경선이 인천에서 치뤄졌다. 승자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했던 조순형 후보가 아닌 이인제 후보였다. 이를 두고 민주당 경선이 10%조차 안되는 저조한 투표율을 보였기 때문에 조직세에서 강한 이인제 후보가 유리했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하지만 일단 조순형 후보에게 쏠려있던 여론을 환기, 새로운 대세론을 끌어내는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2007 대선까지 이 후보의 대권 도전은 3번째. 이 후보는 3수생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경선 불복’이라는 꼬리표에 ‘철새정치인’이라는 불명예스런 닉네임도 유명하다. 이런 가운데 이 후보가 이번 대선을 발판 삼아 정치적 명예 회복을 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두 번의 대선으로 얻은 ‘경선불복’ 꼬리표이인제 후보는 지난 7월5일 대선출마를 선언하면서 “당시 40대의 젊은 저로서는 독자출마를 바라는 국민의 여망을 저버리기 어려웠고, 2002년에는 집권이 확실해진 급진 노선을 추종할 수 없다는 일념으로 탈당을 결행한 것”이라면서 “돌이켜 보면 저에게 많은 허물이 있었고 지난 두번의 대선에서 국민의 뜻을 받들지 못했다”며 앞선 두 차례 대선에 대해 언급했다. 앞선 대선의 행적을 간과하고 넘어가기엔 짐이 너무 큰 탓이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깜짝 놀랄 젊은 후보’라는 발언에 힘입어 하루 아침에 급부상했다. 이 후보는 그 후 신한국당 경선에 출마했지만, 당시 ‘9룡’이 격돌한 신한국당은 결국 이회창 당시 후보를 선택했다. 이 때 이회창 후보는 지지율이 50%대까지 치솟아 사실상 대세를 굳히는 듯했다. 그러나 이회창 후보는 7월 임시국회에서 국민회의가 들춰낸 두 아들 병역비리 의혹으로 지지율이 급락,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와 이인제 경기지사에 이어 3위로 쳐졌다.이인제 후보는 이를 빌미로 9월 초 공개적으로 신한국당 후보교체론을 제기했다. 이후 이 후보는 9월 초 지사직 사퇴 의사에 이어 공식 탈당을 강행했고, 10월 신당 발기인 대회, 11월 ‘국민신당’을 창당하며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당시 이 후보는 일부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를 앞서고 있다고 나올만큼 급격한 상승세를 타고 있던 상황. 이 후보는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을 가뿐히 뛰어넘고, 1위를 달리고 있던 김대중 총재까지 위협하는 듯 했다.그러나 국민신당 창당 후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회복되기 시작했으며, 이인제 후보의 지지율은 하락, 대선을 20여일 앞둔 시점에서는 김대중-이회창의 2강 구도로 좁혀졌고, 12월18일 선거결과 이인제 후보는 19.2%의 성적을 거두고 3위를 차지했다. 이 후보의 두 번째 대권 도전인 2002년, 새천년민주당 경선은 2월22일부터 이인제 노무현 정동영 한화갑 김중권 김근태 유종근 등의 각축전으로 시작, 경선 초반만 해도 당내에는 이 후보의 대세론이 당연시 됐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민주당 경선은 초반 3연전에서 대세가 갈렸는데 3월9일 제주 첫 경선부터 이변이었다. 동교동 구파의 지지를 업고 압도적 1위가 예상됐던 이인제 후보(25.6%)는 한화갑 후보(26.1%)에 이어 2위로 밀렸다. 노무현 후보의 3위(18.6%)는 예상외의 선전이었다. 바로 다음날인 울산, 노 후보는 29.4%로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 후보는 3위(21.9%)에 그쳤다. 그 후 3월16일 광주에서 영남 출신 노 후보가 압도적 1위(37.9%)를 차지하며 돌풍을 이어나갔다.이후 이 후보는 출신지인 대전ㆍ충남에서 연달아 1위를 차지했지만 이미 힘이 빠진 상태. 이 후보는 대구·인천 경선에서 ‘노풍’이 계속 이어지자 2002년 4월9일 김대중 대통령을 향해 ‘金心’ 개입 의혹을 공개 제기했고, 4월17일 후보직을 전격 사퇴했다. 그 후 2002년 12월1일 민주당을 다시 탈당, 자민련에 입당했다. 정계입문 10주년... 4선의원에 3번의 대권도전이인제 후보는 충남 논산 출신으로 올해로 정치 입문 10주년을 맞는 4선의원이다. 이 후보는 1987년 변호사로 일하다 YS의 도움을 받아 통일민주당 중앙상무위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정계에 들어오기전 이 후보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법조인의 길을 가고 있었다. 사시 21회인 이 후보는 법조인의 첫발을 1981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시작했고, 판사 재직시 영장 기각률이 70%에 이를 정도로 소신 있는 법 해석을 했다고 알려졌다. 서울 법대 시절에는 ‘사회법학회’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전태일 분신사건과 3선 개헌 반대 운동 등으로 촉발된 각종 시위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1983년에는 판사생활을 끝내고 변호사로 나섰고, 근로자의 산재, 해고사건 등 노동 인권 관련 변호에도 힘썼다. 정계에 입문한 이듬해인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인 4.26총선에서 안양갑구(현 안양만안)에서 당선됐다. 당시 40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 후 이 후보는 5.18 광주 청문회 당시 일약 청문회 스타로 급부상, 중진급 초선의원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또한 그는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최연소 노동부 장관으로 취임, 그는 1995년 여당 사상 처음으로 경기도지사 후보 경선대회를 치른 뒤, 이어 실시된 초대 민선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그는 이러한 승승장구에 힘입어 1997·2002년 대권 출사표를 던졌고, 현재 2007년 민주당 대선 예비 후보로 3수생의 길을 걷고 있다. /폴리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