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사모님들의 미술관 운영 현 주소는?

검찰, 박문순 성곡미술관장 비리의혹 ‘정조준’…재벌 안주인 미술관 비리실태 도마 위에

2007-10-05     최봉석 기자

30여개 재벌 미술관, 대부분 안주인이 ‘관장’…규모 갖춘 곳 5곳
재벌 안주인 사교장으로 전락…재벌 간 자존심 대결로 설립 남발
전근대적인 운영방식 대부분…미술계에 악영향 끼친다 한 목소리

박문순(53) 성곡미술관장이 신정아씨로부터 받은 조형물 리베이트의 일부를 사적으로 유용한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박 관장은 신씨와 함께 사법처리 될 전망이다. 서울서부지검은 지난 5일 “박 관장이 신씨가 조형물을 판매하면서 받은 리베이트 가운데 공금으로 처리되지 않은 1억여 원 가량을 개인적으로 사용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또 박 관장이 신씨에게 오피스텔 보증금 2천만 원을 건넨 사실을 확인하고 돈을 준 이유에 대해서도 집중 추궁 중이다. 지난 달 28일 박 관장 자택 압수수색에선 50억원 이상의 ‘괴자금’이 발견되기도 했다. 신정아 게이트에서 ‘성곡미술관’이 이처럼 비리사건의 ‘전면’에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세인의 관심사는 성곡미술관의 존재 여부 또는 신정아씨의 사법처리보다는, 이 미술관의 관장인 박문순씨가 ‘재벌 사모님’이라는 사실에 집중돼 있는 듯하다. 박문순 성곡미술관장은 김석원(62) 쌍용양회 명예회장(쌍용그룹 전 회장)의 부인이다.

그래서 한발 더 나아가 재벌 안주인들의 기업 미술관 운영에 대해서도 적잖은 토론이 활발하다. 재벌 안주인이 미술관장직을 맡고 있는 것은 그렇다 치고, 이들이 관장으로서 갖춰야 할 미술관 경영능력이나 미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있느냐는 것. 미술계에선 이 같은 현상이 미술계에 ‘약’이냐 ‘독’이냐는 질문도 던지고 있다. 알려졌다시피 신정아씨는 금호미술관에서 큐레이터를 시작했다. 금호미술관이 이번 사건의 ‘시작’인 셈이다. 그런데 금호미술관 역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금호그룹과 관련돼 있다. 故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 여동생인 박강자(66)씨가 이 미술관을 운영 중이다.검찰이 신정아씨의 비호의혹을 수사하면서 재벌 안주인들이 관장을 맡는 ‘기업 미술관’에 대한 실체분석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재벌 사모님들의 미술관이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일단 그 실태부터 보자. 미술계에 따르면 현재 서울에는 30여 개의 미술관이 있는데, 대부분 미술관의 관장은 재벌가의 안주인이 맡고 있고 이 중에서 제대로 규모를 갖춘 곳은 대기업 안주인이 운영하는 5군데 정도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구체적으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부인 홍라희씨가 관장을 맡은 삼성미술관 리움(부관장은 홍라영씨(홍라희 관장 동생)), 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 부인 정희자씨가 관장직에 있는 아트선재센터, SK 최태원 회장 부인인 노소영씨가 이끄는 아트센터나비 등이 대표적인 예다. 홍라희 관장은 서울대에서 현대미술을 전공했는데, ‘디자인’ 분야에 나름대로 전문가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실제 리움은 기획과 전시형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관으로 조사된 바 있다.

재계 이건희, 미술계 홍라희

이런 까닭에 “경제계는 이건희 회장이, 미술계는 홍라희 관장이 양분하고 있다”는 속설이 재계를 떠돌 정도다.한양대 건축학과 출신에 홍익대 미술사학과 대학원을 수료한 아트선제센터(아트선재센터는 사고로 사망한 김 전 회장의 장남 선재씨의 이름을 따왔다) 정희자 관장도 지난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책임을 맡았던 딸 김선정 부관장과 함께 미술관을 운영하면서 미술계의 ‘큰 손’으로 통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이자 경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를 지낸 바 있는 노소영 관장 역시 지난 97년 최태원 회장의 어머니인 박계희씨가 운영하던 워커힐 미술관을 맡으면서 미술계에 입문했고 지난 2000년 나비의 공식오픈과 함께 취임하면서 미술에 대한 열정을 내비치고 있다.이처럼 재벌 안주인들, 그러니까 설립자들의 부인들이 미술관장을 맡고 그 이후 최선을 다해 활동을 하면서 이런 현상에 대해 우리 문화계의 발전을 위한 기업의 ‘사회 환원’이라는 긍정적인 시각도 있다. 미술계 한 관계자는 “장기간의 경기침체에 따른 미술계의 불황에도 재벌 미술관들의 탄탄한 재정력 때문에 미술계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그러나 ‘미술계가 재벌가 안주인의 사교장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적인 시각부터 시작해, ‘미술에 관심도 없는 안주인이 맡다보니 큐레이터에게 휘둘린다’는 목소리까지 부정적인 의견도 신정아 사건 이후 줄곧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미술계 또 다른 관계자는 “전문성이 담보되어야 할 미술관을 재벌 간의 자존심 대결로 설립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특히 미술관을 놀이터로 생각하는 비전문가 재벌 안주인들도 많아 오히려 미술계 발전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말했다.

재벌 안주인 미술관장 역임, 부끄러운 일

미술계 전문가들은 재벌 안주인들이 미술관이나 화랑과 같은 곳이 풍기는 ‘고상하고 호화로운’ 분위기를 바란 나머지 아무 생각 없이 관장에 취임한 결과, 신정아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작금의 재벌 미술관들의 전근대적인 운영방식에 한 몫 하고 있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한 미술평론가는 “신정아 사건의 경우 재벌 일가 및 개인소유가 많은 미술관에서 이렇다 할 검증없이 친분관계로 채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아 생긴 현상”이라며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못한 재벌 집안 안주인들의 미술관 관장 취임은 미술계에서 볼 때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전문화된 미술관이 증가해야 하고, 검증받은 인력을 채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검찰에 따르면 지난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신정아씨가 성곡미술관에 대기업 후원금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2억4천여만 원을 가로채 이를 박문순 성곡미술관장에게 전달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검찰의 수사 중심이 앞으로 박 관장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일각에선 ‘신정아 게이트’로 치명타를 입고 있는 재벌 미술관이 비단 성곡미술관에게만 해당이 될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성곡미술관처럼 관장 자택에서 발견된 괴자금이 쌍용일가의 비자금일 가능성이라는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미술관=비자금’으로 연결되는 불똥이 다른 재벌 미술관으로도 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이유다. 물론 해당 미술관들은 이 같은 의혹은 “사실무근”이라며 펄쩍 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