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하는 이건희 회장, ‘할 말’만 하는 구본무 회장 … 생산적 회의가 곧 성공의 비결~
[매일일보닷컴] ‘회의’(會議), 문자 그대로 ‘여럿이 모여 의견을 나눈다’는 말이다. 회사의 경쟁력을 높이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위해 임원에서부터 말단 직원까지 하루에도 수많은 회의들을 갖는다.
기업을 대표하는 총수에게 있어 회의는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모든 사업장을 일일이 챙길 수 없는 자리의 특성 상 회의를 통해 중요 내용을 보고 받고, 회사의 중장기 발전 방향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기업 총수들에게는 하루 온종일이 회의의 연속이라고 봐야 한다. 저명한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유능한 경영자가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회의를 생산적으로 하는 것이다. 경영자는 회의 목적을 명확히 알아야 하며 회의가 쓸모 없는 시간 낭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회의를 잘하는 것이 곧 성공한 경영자가 되는 길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재계를 대표하는 국내 굴지 기업 총수들은 어떤 방식으로 회의를 할까. ‘경청’을 최우선으로 꼽는 삼성 이건희 회장을 비롯해, ‘명령’을 중시하는 현대차 정몽구 회장, 격의 없이 ‘토론’을 즐기는 SK 최태원 회장 등 기업의 색깔만큼이나 다양한 총수들의 회의 스타일을 살펴본다.
삼성 이건희 회장- ‘마라톤 회의’ 내내 ‘듣기’에 열중재계를 대표하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대표적인 ‘듣기 형’ 리더로 알려져 있다. 이 회장이 삼성 부회장으로 첫 출근하던 지난 79년 부친 고 이병철 회장은 그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경청(傾聽)’ 이라는 휘호를 직접 써줬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이야말로 리더가 가져야 할 가장 큰 덕목이라는 의미에서였다. 이 회장은 이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회장직에 오른 이후에도 내내 ‘경청하는 리더’의 모습을 보여 왔다. 평소에 이 회장은 삼성 본관 28층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 잘 나오지도 않고, 회의에 참석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대부분의 시간을 한남동에 있는 개인 집무실인 ‘승지원’에서 보내는 편이다. 그러나 이 회장이 일단 회의를 소집하게 되면 삼성 임원진들은 초긴장 상태에 돌입한다. ‘듣기’를 중요시하는 만큼, 임원들의 입장에서는 이 회장에게 ‘들려줄만한’ 내용을 철저하게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회장 또한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다. 회의 전에 이미 비서실을 통해 올라온 보고서를 검토하고, 해당 전문가들을 만나 내용을 숙지한 뒤 몇 차례에 걸쳐 ‘왜’라는 질문을 통해 답을 얻어낼 만큼 사전 작업을 끝낸 후에 임원들의 얘기를 듣는 것이다. 조용히 ‘경청’을 한 뒤에 최종적으로 큰 방향을 잡고 결정을 내리는 식이다.그런가 하면 이 회장은 한번 회의를 하면 정해진 시간 없이, 휴식 없이 장시간의 ‘마라톤 회의’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꼬박 20시간 가까이 회의를 했다는 일화까지 전해진다. 이 회장은 자신의 이런 회의 철학을 아들 이재용 전무에게도 고스란히 물려줬다. 이 전무가 삼성전자 상무보로 처음 입사하던 날 부친에게 받았던 ‘경청’과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삼고초려’ 글귀를 아들에게 건네주며 ‘잘 듣는 것’의 중요성을 일러준 것이다. 현대차 정몽구 회장- ‘회의’는 짧게, ‘명령 전달’ 위주
대학시절 럭비선수 출신답게 불도저식 추진력과 배포를 가진 ‘장형’ 리더의 대표격인 현대차 정몽구 회장.
‘삼국지’의 ‘명장론’을 자주 언급하는 그의 회의 스타일은 한마디로 ‘명령’과 ‘방침 전달’이다. 오전 5시에 기상해, 6시 30분이면 양재동 사옥으로 출근하는 정 회장은 늘 분주하게 현장을 오가고 사업들을 챙기는 만큼 임원 회의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내 점검(?)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이건희 회장과 자주 비교되곤 하는 그는 회의석상에서 장시간의 토론과 대화를 거쳐 결론을 이끌어내기 보다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지시’하는 편에 가깝다. 이 같은 회의 스타일은 자동차 산업의 특성상 창의성보다는 조직력을 중시해서이기도 하지만, 고 정주영 명예회장 때부터 굳어진 가부장적인 현대의 가풍을 이어받은 영향도 크다. 과거 정 명예회장 역시 딱딱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가부장적 가족회의를 갖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임원들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받아 적느라 바쁘고, 질문에 답을 하느라 진땀을 빼곤 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정 명예회장이 잘못 발음한 단어를 그대로 수첩에 받아 적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임원까지 있었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있다. 부친의 스타일을 빼 닮은 정 회장 역시 회의 내내 강한 카리스마로 이런 저런 지시를 내리며 한편으론 사장단이나 임원들에게 불시의 질문 공세를 퍼붓기도 한다. 이때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못했다가는 불같은 호통을 감수해야 함은 물론이다. SK 최태원 회장- 자유로운 ‘토론’ 즐기는 ‘캔미팅’ 유명
SK그룹은 직원들이 자유롭게 음료 하나씩을 들고 회의를 하는 ‘캔미팅’으로 유명하다. 고 최종현 회장이 유학시절 경험을 살려 SK만의 독특한 기업 문화로 자리 잡게 한 캔미팅은 조직구성원들이 일상의 업무활동과 차단된 장소에서 정해진 경영과제에 대해 격의없이 논의하는 회의방식. 부친의 경영방식을 그대로 물려받은 최태원 회장이 주재하는 회의 스타일 역시 ‘격식 파괴’와 ‘자유로운 토론’을 중시하는 ‘캔미팅’으로 요약할 수 있다.최 회장 본인 또한 자유분방한 성격이기 때문에 회의에서도 이런 면이 많이 녹아 있다는 평이다. 일례로 이달 초 남북정당회담 수행원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했을 당시 최 회장은 자신의 디지털 카메라로 손수 회담장 곳곳을 찍는 모습을 보이는 등 재벌그룹 회장 답지 않은 털털하고 격식없는 성격을 드러냈다. 활발한 토론을 중시하는 회의에서 최 회장은 말을 많이 하기 보다는 자신은 그룹 중장기 비전이 담긴 어젠다를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임원들 간에 다양한 논의가 오갈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LG 구본무 회장- 회의도 ‘소탈’하게, 할 말만 ‘간단히’ 그룹 총수 가운데 유난히 소탈하고 검소한 면이 많은 구본무 LG 회장은 회의 스타일에서도 이런 면이 잘 드러난다. 주재 회의 역시 연초나 연말 등 일년에 서너 차례 뿐이고, 대부분 계열사 CEO들에게 위임할 때가 많다. 또 회의에 참석해서도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기 보다는 할 말만 간략하게 하고, 대부분은 임원들의 얘기를 듣는 편이다. 격식을 자제하고, ‘인화’를 강조하다보니 회의 분위기 역시 온화하고 부드러운 편이다. 다만 회의 도중 언제라도 궁금한 것이 생기면 직설적으로 질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질문을 통해 임원들의 생각과 사업 전략 등을 평가하는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질책성 발언이 나오기도 하는데, 특히 지난해 4월 열린 임원회의에서 “일하는 방식과 사고의 틀을 바꾸지 않으면, 1등 LG는 고사하고 생존을 걱정해야 할 지 모른다”고 위기 의식을 고조시키기도 했다. 한편 구 회장이 주재하는 회의에서 특이한 점은 종종 세미나 형식을 겸하기도 한다는 점. 이런 자리를 통해 ‘경영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구 회장은 또 외부에서 전문가를 초빙해 자신이 강조하고자 하는 경영 메시지를 대신 전달하도록 한다. 지난 2005년 8월 열렸던 LG그룹 글로벌 CEO 전략 회의 때는 도요타 자동차의 조 후지오 부회장이 초대돼 ‘고객 가치 중심의 도요타 경영방식’에 대해 강연하기도 했는데, 이는 구 회장이 강조해왔던 ‘고객 경영’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었다. 롯데 신격호 회장- 한 달 내내 ‘회의’ 아닌 ‘보고’ 이어져
재계 최고령 총수인 신격호 회장의 회의 스타일은 ‘보고’ 형식에 가깝다. 아들인 신동빈 부회장에게 그룹 경영권을 상당 부분 넘겨주고, 자신은 두세 달에 한 번씩 한국에 들어오기 때문에 주재하는 회의가 거의 없는 상태다. 대신 홀수 달에 국내에 머물며 롯데호텔 집무실로 사장단을 불러 업무 보고를 받는데, 겉치레나 형식 같은 것은 생략하고 철저하게 계열사 현황을 점검하는 자리이니만큼 이때가 되면 롯데 임원들은 비상이 걸린다. 꼼꼼하기로 소문난 신 회장 성격답게 한달 내내 이어지는 전 계열사의 보고 때마다 임원들의 진땀 빼는 모습이 연출되곤 한다. 특히 실적이 좋지 못한 계열사의 경우 신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각오해야 하고 실적 개선에 대한 향후 대책과 방침에 대한 답변까지 준비해놓아야 하니 해법을 찾느라 분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