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동현 칼럼] 문득 깨달으니 온 우주가 나의 집이네

2019-10-15     고산정 시인 배동현
[매일일보] 세상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종교 역시 전통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을 살찌워간다. 우리나라 주요 종교들의 뿌리는 대부분 다른 나라에 있지만 이 땅에 들어온 후 뛰어난 종교인들을 배출하며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어갔다. 격동의 연속이었던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보편적 진리를 구체적 삶에 담아 내고자 고뇌했던 종교 선각자들의 발자취를 만날 수 있다. 온 나라가 개국(開國)의 여파로 뒤숭숭하던 1880년 6월 어느날 충남 서산군 고북면 연암산 마루밑의 천장암(天藏庵)에 30대 중반의 한 승려가 나타났다. 경허(1846~1912)라는 법명의 이 스님은 당시 불교계에서 경전에 밝은 학승(學僧)으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세상 사람들이 아는 경허가 아니었다. 한 해 전 삼남(三南) 지방을 덮친 콜레라의 참상 속에서 교학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는 선(禪)으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당시 머물던 동학사 강원(講院)으로 돌아간 경허는 제자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방문을 걸어 잠근 후 참선에 몰두했다. 쏟아지는 잠을 쫓기 위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칼을 갈아 턱에 들이대면서 화두에 몰두하던 그는 3개월 만에 의문을 풀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번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해서 그냥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로부터 선가(禪家)에서는 깨달음 이후 그것을 굳게 다지는 수행을 ‘보림’이라 부르며 몹시 중시했다. 경허는 바로 그 보림을 보림을 위해 천장암을 찾았던 것이다. 백제 무왕 34년(633년) 만들어졌다는 천장암은 산위에 달랑 법당 한 채가 자리잡은 작은 암자였다. 당시 천장암에는 그의 친형 태허 선사가 모친 박씨를 모시고 수행 중이었다. 지금도 천장암으로 가는 길은 쉽지가 않다. 큰크리트로 부분 포장된 산길을 자동차로 오르다보면 갑자기 급경사가 나타났다. 할 수 없이 차에서 내려 다시 10분쯤 걸어 올라가자 저쪽에 암자가 보였다. 새 건물을 두 채 짓기는 했지만 법당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잠시 숨을 둘린 후 경허 스님이 사용했던 법당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방을 찾았다. 한 평 남짓한 이 골방에서 경허는 1년 넘게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했다. 그는 한 벌 누더기 옷을 입은 채 지냈으며 모기와 빈대, 이로 뭄이 헐어도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날 구렁이가 방에 들어와 어깨를 타고 올라가는데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자 구렁이가 스스로 기어나갔다. 뼈를 깎는 듯한 수행을 거듭한 끝에 깨달음을 확신하게 된 경허는 천장암에서 첫 설법을 하게 된다. 법당에는 바로 그 설법 때 읊은 게송이 그의 절 집안 증손자인 수덕사 방장 원담스님의 글씨로 붙어있다. “홀연히 고삐 뚫을 곳이 없다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문득 깨닫고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나의 집이네/유월 연암산 아랫길에/일없는 들 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법당 안에는 불상 좌우로 경허 스님과 그의 제자인 만공(滿空)스님 영정이 나란히 걸려 있다. 그렇다. 천장암은 경허 스님뿐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수행한 것이기도 하다. 보림을 마치고 1882년부터 전국을 돌며 꺼져가던 선풍을 다시 불러일으키기 시작한 경허 스님은 이후에도 천장암을 틈틈이 찾았다. 또한 마음에 드는 후학을 만나면 제자로 삼아 천장암에서 수행하게끔 했다. 법명이 월면인 만공을 비롯해서 ‘경허 문하의 세달’로 불리는 수월, 혜월 스님이 출가한 곳이 천장암이었다. 이번에는 오른쪽 능선에 있는 제비바위로 향했다. 경허가 즐겨 좌선을 했다는 곳이다. 공사가 마무리 단계인 서해안 고속도로가 발 아래 있었고 그 너머로 서해 바다와 내포 평야갸 멀리 보였다. 뒷산에는 경허의 또다른 수도 공간이었던 동굴이 있다. 한 사람이 들어서면 꽉 차는 동굴 속에 앉자 맞은 편 삼준산 봉우리가 눈 앞에 마주선다. 다시 천장암 뜰에 서서 바람소리, 새 소리를 들으니 경허 스님이 왜 이 곳을 마음의 고향으로 삼았는지 알 것 같았다. 경허는 어느 처사로부터 ‘콧구멍 없는 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깨달은 소’라는 뜻의 성우(惺牛)라는 법명을 새로 지었다. 이리저리 끌려나닐 일이 없어 자유와 해탈을 상징하는 ‘콧구멍 없는 소’가 되기에는 이곳만한 곳이 없어 보였다.